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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양반이 대우차 부사장으로 있었다니, 다시 봐도 놀랍다
기사입력 :[ 2019-08-30 13:19 ]


20년은 빨랐을지도 모를 파나메라, 포르쉐 989 (2)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1부에서 이어집니다)

◆ 989는 원래 카이엔?

포르쉐의 새 모델로 울리히 베츠가 처음 검토했던 차는 ‘SUV’였다. 지금과 같은 SUV 열풍이 일어나기 한참 전이었지만, 그는 영민한 사람이었다. 최대시장 북미의 오프로더 판매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감지했고, 이 틈새시장을 파고들어가 보려 했다. 하지만 오직 스포츠카만 만든 순수 스포츠 브랜드의 이미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3세대 카이엔이 돌아다니는 지금에서야 뭔 이야기인가 싶겠지만, 당시는 1980년대였다. 메르세데스-벤츠도 BMW도 도심형 SUV시장에 뛰어드는 것은 그로부터 10여년 뒤의 일이다. 컨셉트 스케치가 진행된 정도만 가지고도 브랜드의 가치훼손을 염려한 논란이 회사 안에서 터져 나왔다.

한발 물러선 베츠는 방향을 바꾼다. 베이스가 된 것은 928이었다. 911을 대체한다는 원래의 목표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만든 FR플랫폼과 V8 엔진은 있었다. 이것을 활용한다면 훨씬 실용적이면서도 성능은 동일한 4도어 차를 만들 수 있었다.

엔진은 당연히 928에 탑재된 V8을 기반으로 했다. 각국의 세금과 환경 기준에 따라 3.6리터에서 4.2리터 사이에서 250~350마력을 내는 엔진 계획이 잡혔다. 새 포르쉐의 디자인을 맡은 함 리가이에게는 ‘비즈니스 제트기’를 연상시키는 매끈한 4도어 차를 만들라는 주문이 떨어진다. 2826mm로 대폭 늘어난 휠베이스와 함께.




◆하지만 돈이 없다

하지만 1991년에 접어들면서 989가 중단된다. 이 차의 개발 중단에 대한 가장 유명한 음모론은 얼마 전 작고한 폭스바겐그룹의 제왕, 페르디난트 피에히(Ferdinand Piëch)가 자신의 신작 A8과의 경쟁을 의식해 의도적으로 훼방을 놓았다는 ‘썰’이다.(울리히 베츠 본인이 주장한 내용이기도 하다) 외삼촌 때문에 쫓겨나듯 떠나야 했던 회사였지만, 1991년의 피에히는 아우디-폭스바겐 그룹의 실권을 거머쥔 거물이면서, 포르쉐 감독이사회의 임원중 한 명이 되어 있었다. 그가 속한 피에히 가문이 포르쉐의 지분을 10%나 들고 있는 엄연한 대주주였기 때문이다. 아우디의 첫 대형세단 A8의 개발에 피에히가 전력을 기울였던 것도 사실이다 보니 꽤 신빙성 있게 받아들여 질 법했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프로토타입 실물을 본 피에히는 989를 흠잡을 데 없는 제품으로 평가했다. 989 좌초의 시작은 사장의 ‘실수’ 때문이었다. 당시 포르쉐의 월급 사장은 아르노 본(Arno Bohn). 컴퓨터 업계에서의 성취 덕분에 포르쉐로 불려 들어왔지만, 그는 차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는 잘 모르는 40대 경영자였다. 그가 손본 개발예산안이 실제 개발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는 것이 개발 초기 단계에서 드러난다. 이 사단이 날 동안 넌 뭐했냐는 욕은 베츠도 당연히 먹었다. 부랴부랴 투자예산안이 수정되었고, 그 결과는 모두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989는 원래 예정되어 있던 10만 마르크 (2019년 물가로 환산 시 약 1억5천만원)의 가격으로는 판매가 불가능했으며, 적어도 15만 마르크(2019년 물가 기준 시 약 2억 3천만원)는 받아야 본전치기가 가능했다. 그것도 한 해 최소 1만 5000대를 팔아야만. 가장 큰 문제는 회사에 일단은 덤벼볼 자금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지난 3년간의 포르쉐 매출로는 이런 대규모 개발비를 마련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프로토타입 1호가 만들어질 정도로 개발은 잔뜩 진행된 상태였지만, 감독위원회는 일단 중지를 결정한다. 이대로 달리게 내버려 두었다간 회사가 자빠질 판이었다.



989의 개발중단은 울리히 베츠에게는 그냥 나가라는 말로 들렸다. 그는 자신의 판단에 있어서 확신이 넘쳐나는 사람이었으며, 독선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피에히와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었다. 3년의 추가 계약에 사인한 직후였음에도 자신이 구상한 진로를 뒷받침해주지 못하는 회사에 미련을 버린다. 그는 사표를 던지고 포르쉐를 나가버린다.

989프로젝트가 최종 폐기되는 것은 그의 퇴사 3개월 뒤였다.



989는 십수년 후 나올 파나메라와는 아무런 기술적 접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차였다.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쏟아 부은 프로젝트였지만 그대로 사장되어 버렸으며, 파나메라가 나올 때까지는 존재를 부정당했던 특이한 이력의 차다. 다만 이 차를 만들려 했던 울리히 베츠가 쏟은 노력은 그가 떠난 뒤 고스란히 포르쉐 부활의 동력이 되기는 한다. 그가 만든 공랭식 911의 마지막 세대, 타입993은 공전의 히트를 쳤고, 빈사상태였던 포르쉐의 재정을 빠르게 복구시켰다. 989를 실체화시키면서 나온 수많은 아이디어와 디테일은 이후 개발된 신형 911, 타입 996의 기반이 된다. 그가 입안한 포르쉐 SUV는 차기 사장의 손을 거쳐 결국 카이엔으로 시판돼 포르쉐의 강력한 ‘현금자판기’ 역할을 맡고 있다.



◆ 울리히 베츠, 그 후

포르쉐를 떠난 울리히 베츠가 향한 곳은 뜻밖에도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1992년, 그는 대우자동차(!)에 기술고문으로 합류한다. 대우차에게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맨바닥에서 기술자립을 외치던 회사에 그의 개발능력과 네크워크는 소중한 자원이 되었고, 1년 뒤에는 연구담당 담당 부사장 자리에 오른다. 딱히 기술이랄 것도 없던 회사가 갑작스레 라노스-누비라-레간자로 이어지는 독자 라인업과 파워트레인을 초고속으로 쏟아낸 이면에는 부평 엔지니어의 피땀은 물론 그가 주도한 영국 워딩 테크놀러지센터, 그리고 뮌헨 파워트레인센터의 기술지원이 있었다.



하지만 대우그룹은 경제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한다. 그는 대우차를 떠난 뒤, 당시 대우차를 인수하려던 포드에 합류했고, 나중에는 포드의 산하 브랜드 중 하나였던 애스턴 마틴의 경영을 맡는다. 사실 언제 망해도 이상할 게 없는 애스턴 마틴이었다. 자금상황은 최악이었고, 차라고는 몇 년 된 DB7 하나가 남아있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는 데쟈뷰를 느꼈다. 망하기 직전의 회사, 오래된 911 하나. 1988년의 포르쉐도 똑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차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랜 바람이 비로소 실현됐다.



그는 애스턴 마틴에서 14년을 보냈다. 그의 재임기간동안 애스턴마틴은 스무 가지가 넘는 신모델을 만들고, 도합 5만대가 넘는 차를 팔았다. 13년 동안 5만대라니, 별로 많은 숫자가 아닌 것 같지만, 이것은 창사 이래 그가 오기 전까지 90년 동안 팔린 애스턴마틴의 3배가 넘는 숫자였다.

그의 재임기간 중 시판된 애스턴 마틴 중에는 4도어 패스트백 세단, 라피드도 있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변성용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13년간 객원기자로 글을 썼다. 파워트레인과 전장, 애프터마켓까지 자동차의 다양한 분야에서 업무를 수행하며 자동차를 보는 시각을 넓혔다. 현재 온오프라인 매체에 자동차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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