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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해도 안 되는 벤츠의 뼈아픈 구멍 ‘미니밴’
기사입력 :[ 2018-05-14 08:10 ]


만드는 족족 잘 팔리는 벤츠도 망할 때가 있더라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18개 라인업. 2018년 현재 메르세데스 벤츠가 만드는 승용모델의 가짓수다. 가지치기 모델을 제외한 차량 형태만 놓고 본 것이니 세세하게 따지면 그 숫자는 몇 배로 늘어날 것이다. 중대형 세단에 치중한 차 만들기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이제는 경차에 해치백, SUV에 경트럭도 모자라 하이퍼카까지 만든다. 단 한 개의 세그먼트도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기세다. 게다가 만드는 족족 잘 팔리기까지 한다. 도대체 이 회사가 실패한 적이 있기나 한가 싶을 정도다.

왜 없을까. 당연히 있다. 라인업을 잘 들여다보면 유독 한 가지 비는 차종이 보일 것이다. ‘승용’ 미니밴 말이다.



◆ 미니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벤츠의 구멍

미니밴 시장은 거대하다. 많은 수의 사람을 실어 날라야 하는 다인승 차량 시장은 경기나 시장 흐름과 상관없이 꾸준한 수요층이 있다. 그래서 양산 자동차 회사라면 당연히 미니밴을 만들며 대부분 판매량을 견인하는 효자상품이 되어 준다. 벤츠 또한 판매시장을 확대하려면 미니밴을 당연히 만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V클래스로 이름이 바뀐 비토/비아노는 이미 3세대에 이르는 모델체인지를 거치며 확실히 자리를 잡은 상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V클래스는 승용모델로 분류하기 보단 공구와 짐을 싣고 달리는 패널밴 역할이 훨씬 본질에 가까운 차다. 이 차의 성격을 잘 설명할 수 있는 차가 국내에도 있으니 바로 스타렉스 되겠다. 다수의 사람을 실어나르는데 있어 모자람 없는 차지만, 막상 자가용으로도 쓸 미니밴을 골라야 할 경우 선택하는 차는 십중팔구 카니발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승용 플랫폼 기반의 미니밴. 벤츠가 시도했던 차가 바로 이거였다.



2000년대 초반, 벤츠와 크라이슬러가 합치며 탄생한 ‘미국회사’ 다임러-크라이슬러가 맨 처음 검토한 제품이 바로 미니밴이였다. 미니밴의 최대 수요처 미국에 맞춰 크라이슬러의 미니밴용 S플랫폼을 가져다 만져 보지만, 결과물의 상품성이 벤츠의 제품군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 판단된 순간, 프로젝트는 중지된다. (제법 진도가 나간 차는 크라이슬러가 넘겨받아 마무리한 뒤 ‘퍼시피카’라는 이름을 붙여 내 놓는다.) 벤츠가 바라본 건 고급화된 승용 미니밴을 사줄만한 수요층, 이른바 사커맘들이었다.

사커맘. 처음에는 미니밴으로 아이들을 축구연습장에 데리고 가고, 아이의 연습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엄마들을 지칭하던 말이었다. 북미에선 인기 없는 축구를 굳이 시켜가며 먼거리를 다니는 별난 엄마들을 보며 이들의 유럽 문화 지향을 비꼬는 뉘앙스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아이의 장래를 위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 열성적인 엄마들의 대명사가 된다. 흔해터진 미니밴 대신 경제력을 갖춘 이들을 위한 고급 미니밴이 나올 때가 왔다고 벤츠는 믿었다.



◆ 벤츠의 미니밴 재도전

벤츠의 미니밴 도전은 사실 두 번째였다. 이미 7인승 미니밴을 만들었다가 대차게 말아먹은 적이 있었다. 최초의 앞바퀴 굴림 A 클래스가 대 성공을 거두자 지나치게 용기를 얻은 그들은 A클래스를 잡아 늘인 뒤 슬라이딩 도어를 단 7인승 밴 바네오(Vaneo)를 시판한다. 남들 다하는 마이크로밴 시장에 입성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비네오는 극도의 판매부진에 시달리다가 3년 만에 단종된다. 벤츠 역사상 최단명한 시판차였다.

안하던 짓을 해봤다가 대차게 말아먹은 뒤의 행보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이번에는 기술과 디자인에서 아무런 모험을 하지 않고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고급차 제작의 정공법으로 미니밴에 접근하기로 한다. S클래스에서 가져온 넓은 후륜구동 플랫폼은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보다도 길 정도로 엄청나게 컸다.(롱 휠베이스 기준) 그럼에도 밸런스가 잘 잡힌 디자인과 SUV보다도 낮은 자세 때문에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다.



당대 벤츠의 특징인 원형 헤드라이트를 포기 못한 디자인을 놓고 논쟁의 소지가 있었지만, 최상급 벤츠의 품질을 그대로 옮겨 놓은 내장은 아무 말을 못할 정도로 훌륭했으며 이 점이 바로 판매포인트이기도 했다. 모든 차는 총 3열에 최소 2개씩 시트가 배치되었고 2열은 최대 1미터의 레그룸을 제공했다. 3열시트조차도 등받이를 4단으로 조절 가능해 편안하고 근사한 라운지처럼 앉을 수 있었다. 2열과 3열 시트는 완전히 평평하게 접을 수 있어 이 경우 2,400리터나 되는 적재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후드가 달린 게이지나 컬럼식 기어 셀렉터, 최신식 시동/정지 버튼이나 센터콘솔 같은 많은 실내 장비들은 신형 M클래스 SUV에서 가져왔다. 구조는 틀리지만 소프트터치의 플라스틱 질감이나 클래식한 우드와 크롬 트림이 격조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V6과 V8 두 가지 엔진에 7단 변속기, 4륜구동 옵션까지 마련된 차는 성능과 승차감 모두 나무랄 데 없었다. 왜건의 다양한 활용성과, 어떤 길도 주파하는 SUV의 자유로움, 그리고 대형세단의 고급스러움과 성능까지 모두 아우르는 새로운 스포츠 투어러는 R 클래스라는 이름을 받고 2006년 발매된다.



◆ 그런데 안 팔린다.

다임러-크라이슬러는 매년 5만대의 R 클래스를 팔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시장은 영 다르게 반응했다. R 클래스 판매의 절반을 책임져 줄 미국 판매량은 첫해 1만9천대를 시작으로 다음해 1만3천대로 빠져나가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해 8천대 수준까지 떨어진다. 이 차에 열렬히 호응해 줄 것이라 생각했던 사커맘들은 냉큼 고급 미니밴으로 갈아타지 않았다. 대중 브랜드의 미니밴으로도 사커맘의 라이프스타일은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조금 더 고급차를 사는 가족은 아예 SUV로 옮겨 가는 쪽을 택했다.

당황한 벤츠가 부랴부랴 마이너 체인지를 준비하는 동안 서프브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진다. 목표로 한 미국 중산층 이상의 삶이 작살이 나면서 고급차 시장도 철퇴를 맞는다. 판매량은 3000대 미만까지 곤두박질 쳤고, 마이너 체인지 후에도 판매량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2012년, 벤츠는 R 클래스의 미국 판매 중지를 선언한다. 더 이상 이 차의 후일을 기약할 필요가 없어진 벤츠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한다. 남은 재고를 모조리 택시로 털어내 버린 것이다.



◆ 뜻밖의 생산 재개

2012년 R 클래스의 생산은 종료되었으며, 대부분의 시장에서 단종 수순을 밟지만, 이상하게도 R 클래스의 판매는 계속 이루어진다. 그러던 2015년, R클래스의 생산재개가 선언된다. 실질적 단종 수순을 겪은 차가 다시 생산되는 것도 희한한 일이였지만 이 차를 만들겠다는 곳은 더 뜬금없었다. R 클래스가 다시 생산된 곳은 험비의 생산기지인 AM제네럴이였다. 주문이 밀려들었지만, 신형 SUV 물량만으로도 포화상태인 알라배마 공장을 쓸 수 없었던 벤츠가 생산전문회사에 차를 통째로 위탁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다시 만들어진 차가 향한 곳은 중국이었다. 거대한 차체와 고급스러운 내장, 그리고 광활한 공간을 갖춘 벤츠의 미니밴은 중국의 쇼퍼 드리븐 문화에 꼭 맞는 차였다. 이미 단종 수순을 밟고 있던 차가 뒤늦게 특정 국가의 소비자에게 재발견되어 다시 생산되는, 특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모두 3만 여대의 R 클래스가 다시 만들어졌다. 2017년 10월 마지막 R 클래스가 공장을 빠져나오며, 벤츠의 승용 미니밴은 막을 내린다. 현재 R 클래스의 후계모델은 전혀 계획이 잡혀 있지 않다. 승용 미니밴의 부활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한 벤츠의 답변은 짧고 단호했다.

‘우리에게는 GLS라는 훌륭한 7인승 모델이 있습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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