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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판962CR, 1990년대의 낭만을 증명하는 마지막 흔적
기사입력 :[ 2018-08-31 13:39 ]


레이스카 그대로의 슈퍼카, 슈판 962CR (2)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1983년 르망24시 우승자, 번 슈판(Vern Schuppan), 마치 독일사람 같은 이름의 소유자지만, 그는 사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 출신이다. (그러니 베른이 아니라 번이라고 읽어야 할 것 같다.) 철들기도 전에 카트를 시작한 사람이 대부분인 프로 레이서의 세계에서, 그의 시작은 아주 늦은 편이였다. 스물네 살에 처음으로 참가한 카트 레이스를 시작으로, 몇 년 만에 F1을 밟게 될 정도로 재능은 있었지만, 거기엔 그보다 빛나는 천재들이 우글대는 곳이었다. 5년가량 이런 저런 팀을 전전하다가 F1을 뒤로 한 채, 새로 도전한 미국의 포뮬러 레이스에서도 그는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다. 그의 레이스 인생이 활짝 핀 것은, 내구 레이스로 방향을 튼 뒤부터였다.

1983년 르망24시 레이스에서 그가 웍스 드라이버로 출전한 포르쉐 956 3번 차는, 재키 익스와 데릭 벨 같은 전설적인 드라이버가 탄 1번 차를 제치고 우승한다. 여세를 몰아 출전한 제1회 일본 스포츠 프로토타입 챔피언십까지 승리를 차지하면서 그는 드디어 빛나는 존재가 된다. 르망 우승자이자 초대 챔피언의 타이틀이 주는 광휘는 일본의 레이스 시장에서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한다. 슈판은 아예 일본에 ‘팀 슈판’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일본 레이스 활동을 시작했다.



◆ 일본 레이스와 함께 싹튼 962CR의 꿈

포르쉐의 내구 레이스카 956은 962 그리고 WSC의 962C로 진화하며 10여 년간 전세계 내구레이스를 지배했으며, 사설팀의 경쟁 속에서 다양한 파생모델이 만들어진 차였다. 슈판의 팀 또한 포르쉐의 기술 지원 속에서, 차량의 구석구석을 개선해 나갔다. 1980년대 말이 되자, 당시 신기술이던 카본 파이버 차체 공법이 962에 도입된다. 원래는 포르쉐의 차기 레이스카에 도입하려 검토하던 것이었지만, 레이스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자 그냥 자료를 넘겨준 것이다. 든든한 스폰서 덕분에 비용문제에서 자유로웠던 슈판은 카본 모노코크의 962C 제작에 뛰어든다. 이미 5년 이상을 일본에서 활동한 슈판은 일본의 재원과 해외의 레이스 인맥을 잇는 가교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카본 파이버를 통한 962C의 완전한 재해석을 통해, 그는 독자적인 차량 제작이 가능한 수준까지 올라간다. 다만 수명이 다 되어 가는 962의 레이스 시장만으로는 카본제 레이스카에 투자한 비용 회수가 요원한 문제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메인 스폰서였던 오사카의 슈퍼카 딜러, 아트 스포츠(Art Sports)의 테라다 사장에게 자신의 구상을 보여준다. 슈판은 962C 기반의 도로용 슈퍼카를 만들어 본전을 뽑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 일본 자본으로 완성된 차

초안은 다른 회사의 도로주행용 962와 다를 바 없었다. 슈판의 레이스카를 만든 영국의 컨스트럭터, 레이나드(Reynard) 모터스포츠와 제작한 첫 차는 카본 + 알루미늄 모노코크 바디에 구형의 바디쉘을 입힌 962 그대로의 차였지만, 그 속은 시판차의 충돌규정까지 고려한 설계가 반영되어 있었다. 마침내 영국의 도로주행 번호판까지 받아내는데 성공하지만, 물주였던 아트 스포츠가 원한 것은 그냥 도로를 달리는 962가 아니었다. 슈퍼카 애호가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새 차는 도로용 포르쉐의 이미지와 분명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대상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포르쉐 959. 페라리 F40와 더불어 버블 시대를 상징하는 포르쉐의 시판 슈퍼카. 한정수량만 만들어진 당대 독일기술의 정수는 같은 혈통의 차에 입히기에는 최고의 선택지였다. 959의 이미지를 포르쉐의 그룹C카에 이식한 디자인은 그의 인맥중 하나인 호주 홀덴의 현직 디자이너가 알바 삼아 작업한 것이었다. 동그란 프론트의 헤드라이트나 흡기 포트, 차체와 연결된 리어 윙, 한 줄로 이어진 테일 라이트까지 959의 디테일이 풀카본 바디위에 남김없이 구현된다. 동그란 캐노피 형태의 캐빈을 빼면 더 이상 962의 흔적을 찾기 힘든 모습의 차는 962C의 로드(Road) 버전이라는 뜻에서 슈판 962CR라고 이름 지어진다. 포르쉐가 직접 참여하지 않은 차에 포르쉐의 이름을 붙일 순 없었지만, 누구나 이 차를 보는 순간 같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건 포르쉐의 시판 슈퍼카라 해도 믿을 수밖에 없는 자태를 가지고 있었다.



디자인은 달라졌지만 그 내용물은 슈판의 내구레이스카와 다를 바 없었다. 독자적인 욕조형 카본 샤시를 기본으로 962C의 서스펜션을 그대로 장착한 차가 레이스카와 달랐던 것은 댐퍼가 일반 도로용으로 만든 코니(Koni) 제품이였다는 것밖에 없었다. 가죽을 씌워 놓기는 했지만 단촐하기 짝이 없는 실내는 쾌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차피 본바탕이 한계까지 기능만 추구한 내구 레이스카. 규정에 따라 조수석 공간을 만들어 붙였을 뿐, 실제로는 기자재가 들어차야 할 공간에 억지로 달아맨 추가 좌석은 감히 몸을 우겨 넣었다간 운전자까지 옴쭉달싹 못할 상황을 만들었다. 이 차는 어디까지나 혼자서 질주하는 차였다. 그렇게 달릴 수만 있다면, 이 모든 수고를 단번에 보상해 줄 수 있는 차이기도 했다.



섀시에 그대로 직결된 엔진은 지난 10년간 내구 레이스를 지배했던 3.3L의 공랭식 수평대향 6기통 트윈 터보. 포르쉐가 손을 뗀 뒤 IMSA GTP용 962를 제작하던 미국 앤디얼(Andial)사에 특주한 물건이었다. 결승 레이스에서는 1000마력을 넘기는 것도 가능한 엔진이지만, 시판 휘발유의 옥탄가에 맞추어 매핑한 뒤 촉매와 배기라인을 갖춘 일반도로 사양은 1.2bar의 부스트에서 600마력을 냈다. 포르쉐제 5 단 풀싱크로 기어박스와 맞물린 345사이즈의 뒷 타이어를 통해, 1000kg이 살짝 넘는 차는 단번에 370km/h로 달릴 수 있었다. 0-100km/h 3.5초의 가속도 대단했지만, 이 차의 진면목은 이런 미친 가속이 어느 속도 영역에서나 가능했다는 것이다. 횡가속이나 회두성 같은 특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훈련받은 레이서가 아닌 보통의 인간의 입장에서, 감각에 앞서 반응하는 차는 두려움마저 느껴질 정도였으니.



◆ 도로를 달릴 수 있었던 마지막 레이스카

아트스포츠는 이 차를 딱 50대만 만들 생각이었다. 당시 경쟁상대인 재규어의 XJR-15가 그 정도는 무난히 파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일본시장만으로도 최소 20여대의 계약을 자신했기 때문이었다. 차량가격은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고시 가격은 미화 150만 달러 이상이었고, 실제로 엔화 1억9천500만 엔에 판매된 기록은 있다.(현재 물가 환산 시 약 43억원) 슈판 962CR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차였다. 하이퍼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성능과 가격 모두 차원을 달리했던 차는 목표량을 채우고 최초의 하이퍼카로 기록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버블은 터졌고 경기는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일본에서 주문을 받아 선적까지 마친 2대의 차가 구입을 취소하는 상황에 이르자, 슈판이 더 이상 버틸 방도는 없어졌다. 1994년 그가 파산을 선언할 때까지, 프로토타입을 포함해 모두 6대의 962CR이 만들어졌다. 사고로 소실된 차를 빼면 현재 전세계에 남은 슈판 962CR은 단 4대. 더 이상 만들어질 일이 없는 차는 수집가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지낼 것이다.



이제 슈퍼카를 넘어 하이퍼카가 달리는 시대가 되었다. 자동차가 있는 한 일반도로를 달리는 고성능 차도 계속 만들어 지겠지만 오직 레이스를 위해 만들어진 차가 번호판을 받고 일상을 달리는 일은 이제 불가능하다. 962CR 이후 20년, 지속적으로 높아진 환경과 안전에 대한 규제는 시판차와 레이스카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간극을 만들어 놓았다. 레이스카가 도로를 달릴 수 있었던 낭만의 시대, 슈판962CR은 그 1990년대를 증명하는 마지막 흔적일지도 모른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변성용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객원기자로 일했다. 파워트레인과 전장, 애프터마켓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업무를 수행하며 자동차를 보는 시각을 넓혔다. 현재 글로벌 자동차 전문지 의 객원기자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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