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쫄딱 망한 람보르기니가 갑부 부가티 ‘사생팬’ 만나 벌인 일
기사입력 :[ 2019-02-01 10:06 ]


세계 최고가 자동차 부가티가 애써 부정하는 슈퍼카
베이론 이전의 슈퍼 부가티, EB110 (1)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세계 최고가, 세계 최고속. 부가티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자동차 세계의 정상에서 군림하고 있는 유명한 브랜드지만, 그 대담한 차로 쏟아지는 관심에 비해 브랜드 자체는 별로 알려진 게 없다. 1998년에 폭스바겐 그룹 소속이 되기 전에도 차를 만들었다는 것 정도다. 혹시라도 궁금함을 참지 못해 인터넷 검색을 돌려 보면, 쏟아져 나오는 고색창연한 자동차들을 통해 꽤 의외의 사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첫째, 굉장히 오래된 회사다. 첫 차가 만들어진 것이 1900년이니, 그 시작이 자동차의 초기 역사와 바로 맞닿아 있다. 둘째, 종종 그 출신지를 이탈리아로 오해 받지만 사실은 ‘프랑스’ 브랜드다. 창업자 에토레 부가티는 분명히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당대 기술과 문화의 중심이던 프랑스로 국적을 바꾸어 버렸으며, 프랑스 몰샤임 (Molsheim)에 회사를 세운 뒤 철저하게 프랑스인으로 살았다. 셋째, 이미 몇 번이나 부활과 사망을 반복했다. 탄생부터 최고급, 최고속, 최고가를 한결같이 추구하며 잘 나가던 시절도 있었지만 2차 대전의 무렵에는 내리막길로 굴러 내려가다 1947년 창업자가 사망하며 완전히 망한다.

여기서부터 폭스바겐 그룹 사이의 시간만 50년이다. 고풍스런 애틀란틱 다음 바로 최첨단 베이론이 나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베이론 이전에도 부가티의 이름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은 있었으며, 심지어 수백대의 양산 슈퍼카가 만들어지도 했다. 지금의 부가티가 애써 부정하는 차, 오늘은 바로 이 잊힌 슈퍼카에 대한 이야기다.



◆ 1985년 여름, 이탈리아 토리노

페루치오 람보르기니(Ferruccio Lamborghini)는 슈퍼카의 세계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는 람보르기니의 창업자였지만, 운영에 관여할 권리는 이미 십수년 전에 날려 먹은 터였다. 경영난에 빠진 회사를 살리기 위해 회사의 지분을 모두 넘겼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놔둔 채 빈손으로 빠져나온 회사는 그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빈사상태였다. 그걸 쳐다보고 있는 것은 분통이 터질 일이였지만, 자신의 이름을 쓸 권리조차 모두 놔두고 나온 사람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아직 업계에 남아있는 옛 친구들을 불러모아 복귀 방법을 궁리한다. 그 ‘왕년’의 친구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았다.

- 파올로 스탄자니(Paolo Stanzani): 페라리 288GTO와 람보르기니 쿤타치 (카운타크/Countach)의 설계자
- 누치오 베르토네(Nuccio Bertone): 이탈리아 최고(最古)의 카로체리아 베르토네의 대표 맞다.
- 로마노 아르티올리(Romano Artioli): 이탈리아와 독일에 걸친 페라리 딜러망과 스즈키의 이탈리아 총판권을 가진 기업가. (당연히 갑부.)
- 장 마크 보렐 (Jean-Marc Borel): ?

장 마크 보렐은 이 거인들의 회동에 낀 무명의 프랑스인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새 프로젝트의 키를 쥔 사람이 된다. 실행, 디자인, 개발 주체가 모여 경량의 컴팩트한 슈퍼카를 기획해 보려던 자리에서 그는 ‘부가티’ 브랜드를 가져올 수 있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프랑스 정재계에 넓은 인맥을 가진 보렐은 당시 부가티의 권리를 쥐고 있던 프랑스의 국영 항공기업 스네크마(SNECMA)의 협상 포인트를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테이블에 둘러 앉아 있던 모두가 흥분해서 펄쩍 뛰어올랐지만 특히 아르티올리는 더했다. 그는 이미 열대가 넘는 클래식 부가티를 끌어 모은 부가티 ‘사생팬’이었다. 인생 아이돌을 직접 살려내 데뷔시킨다는 계획을 접하자 그는 전율을 넘어 까무러칠 지경에 이른다. 아르티올리는 이 프로젝트를 직접 지휘하리라 마음먹는다. 사실상 덕질이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 부가티 부활 프로젝트 개시

그러나 보렐의 장담과는 달리 실제로 부가티 브랜드를 가져오는 데에는 꽤 긴 시간이 걸린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부가티는 여전히 프랑스를 대표하는 브랜드였으며, 남겨진 차는 매년 자동차 사상 최고가 기록을 경신하며 인류의 유산 대열에 올라버린 참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이탈리아 놈들에게 인류의 유산을 훌쩍 넘겨줄 수는 없는 일. 이들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게 하는데 거의 2년을 까먹어야 했다.



브랜드는 넘겨받았지만 몰샤임의 부가티 공장과 저택은 결국 넘겨받지 못했다. 부가티를 만들던 자리에서 부활이 이루어지는 것이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재’는 팔지 않는다는 그들의 입장은 완강했다. 착공을 마냥 늦출 수만은 없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모데나에 공장과 연구센터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한다. 명분상 부가티는 프랑스에서 만들어져야 마땅한 차였지만 페라리와 람보르기니가 위치한 모데나는 슈퍼카 제작을 위한 인력과 부품 인프라가 완비된 사실상 최선의 선택지였다. 결국 실리가 명분을 뛰어 넘는다.

아르티올리는 자신의 사촌인 건축가 지안파올로 베네디니(Giampaolo Benedini)에게 공장을 설계할 것을 부탁한다. 돈을 아끼지 말고 네가 가진 재능을 모두 퍼부어 보라는 호쾌한 주문과 함께. 2년 만에 13,000평방미터의 넓이에 디자인, 설계, 개발 및 생산은 물론 고객 파티(!)까지 염두에 둔 종합 시설이 들어섰다. 건설비만 당시 기준으로 10억 프랑(1990년 기준. 현재 물가 환산 시 약 5,000억원)을 들인 부가티의 본사는 자동차 제작사로는 보이지 않는 현대적인 건축미를 자랑했다.



◆ 거장 넷이 붙은 디자인. 그 승자는…

아르티올리의 ‘덕질’은 건축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앞으로 나올 차는 부가티라는 이름에 걸맞은 최고 중의 최고의 디자인으로 완성되어야 했다. 그는 한 명도 아니고 무려 네 명에게 프로젝트를 맡긴 뒤 디자인 경합을 시킨다. 스탄자니가 설계한 섀시의 도면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자동차 디자인계에서 빛나는 별 같은 존재였다. 평소의 자존심이라면 이런 조건을 받았을 리가 만무했지만, 부가티의 디자이너가 될 수 있다는 유혹은 아무도 뿌리치지 못했다.



- 파올라 마르틴(Paolo Martin): 전위적인 디자인에서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한 그에게 부가티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슬라이딩 탑승구에 분리형 윙을 가진 차는 너무나 급진적이었다. 스케일 목업을 본 아르티올리는 바로 퇴짜를 놓는다.



- 조르제토 쥬지아로(Giorgetto Giugiaro): 설계안만 제출했다가 떨어져 버렸지만, 그래도 설마 싶었던 이탈디자인의 수장은 자비를 들여 1:1 목업까지 만든다. 완성된 차는 미래적이면서도 유려한 선이 인상적이었지만, 아르티올리가 생각한 부가티의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부가티 컨셉트 ID90은 결국 선택받지 못하지만, 쥬지아로는 있는 걸 가져다 파는데 능한 장사꾼이었다. 그는 이 차를 살짝 손본 뒤 BMW에 나즈카(NAZCA)라는 컨셉으로 팔아먹는다.



- 누치오 베르토네(Nuccio Bertone): 초기부터 프로젝트의 멤버였던 이 디자인계의 거장은 경합을 붙이는 것 자체가 못마땅했던 것 같다. 1:1 클레이 모델을 만들고 피닌파리나의 풍동에서 테스트까지 마쳤지만, 아르티올리의 지적질에 ‘나 안해!’를 외치고 프로젝트를 접어버린다. 그래도 힘들게 만든 거니 결과물은 나중에 로터스 이모션(Emotion)이라는 이름으로 한번 더 써먹는다.



- 마르첼로 간디니 (Marcello Gandini): 람보르기니 미우라(Miura), 쿤타치(Countach), 란치아 스트라토스(Stratos)를 디자인한 이 거장이 들고 온 것은 참으로 성의 없게도 치제타 V16의 초기 모델링. 그러니까 디아블로의 원형을 살짝 손본 것이었다. 초기 섀시와 가장 부합하는 디자인이었던 관계로 이를 기반으로 한 테스트 차량까지 만들어지지만, ‘빠돌이’ 아르티올리가 람보르기니 짝퉁에 만족했을 리 없다. 그는 간디니에게 디자인 수정을 요구한다. 간디니의 직업적 자긍심이 ‘또’ 발동한다. 간디니가 계속 말을 안 듣자, 아르티올리는 공장을 디자인한 건축가 사촌을 불러 차를 전면적으로 손볼 것을 지시한다. 간디니가 ‘또’ 삐쳐서 프로젝트에서 빠졌을까? 두말하면 잔소리다. (간디니의 바로 직전 ‘삐짐’은 치제타 V16 1편에: https://auto.v.daum.net/v/oLvYyqiyw9)

간디니가 빠지기 전에도 이미 이탈자는 나온 상황이었다. 그 누구도 아닌 프로젝트의 원안을 만든 당사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였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은 ‘물주’ 아르티올리가 전권을 휘두르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부가티 부활의 프로젝트에서 더 이상 그가 맡을 역할은 없었다. 일생의 마지막 도전에 회한만을 남긴 채, 그는 프로젝트를 떠난다. 1993년 사망할 때까지 페루치오는 고향의 포도밭에 틀어박힌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부에서 계속 됩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변성용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13년간 객원기자로 글을 썼다. 파워트레인과 전장, 애프터마켓까지 자동차의 다양한 분야에서 업무를 수행하며 자동차를 보는 시각을 넓혔다. 현재 온오프라인 매체에 자동차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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