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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백’ 용어에 대한 오해와 진실
기사입력 :[ 2019-02-06 10:07 ]


‘제로백’이라는 단어 쓰면 무식한 티 내는 걸까

[전승용의 팩트체크] 가끔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며 흠칫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제가 미처 몰랐던 사실에 대한 지적이나, 저와 다른 생각에 대한 꽤 납득할 만한 주장, 우리 모두의 합의가 필요한 사안에 대한 문제 제기 등을 볼 때면 말이에요. 뭐, 여전히 부정적인 댓글에 상처를 받을 때가 더 많지만, 이렇게 신선한 자극을 주는 댓글이 좋아 아직까지 댓글 보는 것을 끊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쓰는 팩트체크 칼럼도 이런 비슷한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기도 하고요.

‘첫 고성능 SUV ‘투싼 N’ 340마력에 제로백 6초 이내’란 기사에 달린 댓글입니다. 현대차가 SUV 모델인 투싼에 고성능 브랜드인 N을 처음으로 접목한다는 기사인데요. 댓글은 투싼 N에 대한 이야기보다 제목에 적힌 ‘제로백(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댓글의 내용을 정리하면 ‘제로백은 80년대 일본 월간지에서나 쓰는 은어로 영어인 제로(zero)와 숫자 100을 뜻하는 한자(百)이 더해진 정체불명의 단어다. 바른 용어를 쓰자’입니다.

댓글을 쓴 독자의 주장은 합당합니다. 제로백은 잘못된 표현이 맞습니다. ‘제로 투 헌드레드(km)’도 아니고 ‘제로 투 식스티(마일)’도 아니고 ‘제로백’이라뇨. 몇몇 국어사전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절대 표준어는 아닙니다. 제조사나 포털 사이트 역시 공식 제원표에 제로백이라고는 쓰지 않습니다.



사실 저 댓글을 보는 순간 움찔했습니다. 자주는 아니어도 저도 가끔 쓰거든요. 잘못된 것을 알면서… 그래서 간만에 생각이란 걸 해봤습니다. 저는 왜 제로백이라는 단어를 쓸까요.

자동차 기자를 처음 할 때 뭣도 모르고 제로백을 썼다가 선배에게 혼났던 기억이 있습니다. 혼난 이유는 앞에 설명한 그대로입니다. 영어와 한자어가 결합한 근본 없는 외계어를 쓰면 안 된다는 것이었죠. 충분히 이해가 갔고, 다음부터는 안 쓰게 됐습니다.



그런데 2가지 이유로 생각이 조금 바뀌게 됐습니다. 우선,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란 긴 글을 ‘제로백’이란 세 글자로 줄일 수 있다는 유혹이 컸습니다. 특히나 신차의 엄청난 가속력을 기사 제목으로 어필하고 싶을 때면 이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부가티 시론,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가속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2.3초’와 ‘부가티 시론, 제로백 2.3초’를 비교해보죠. 후자가 훨씬 더 깔끔하지 않습니까. 읽기도 더 편하고요. 뭐, ’부가티 시론, 정지상태에서 시속 100km 2.3초’나 ‘부가티 시론, 0-100km/h 2.3초’라고도 쓸 수도 있지만, 읽히는 임팩트가 떨어지죠. 이렇다 보니 본문에는 올바른 표현을 쓰면서도 제목에는 제로백이라 적는 경우가 생기게 된 것이죠.

더 큰 이유는 두 번째입니다. 제로백은 오랫동안 자동차 업계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겁니다. 비단 전문성 떨어지는 기자들이나 자동차를 잘 모르는 독자들이 쓰는 단어가 아니라, 많은 자동차 업체 종사자들까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제로백이란 말을 내뱉습니다. ‘눈 가리고 아웅’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퍼질 대로 퍼진, 가속력을 가장 잘 나타내는 함축적 단어를 억지로 막을 필요가 있겠냐고요.

물론, 올바른 용어를 쓰는 게 맞습니다. 제가 든 2가지 이유는 비겁한 변명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댓글에 달린 대댓글을 보니 무턱대고 쓰지 말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는 듯합니다.



제로백을 쓰지 말자는 것만큼 쓰자는 주장이 만만찮습니다. 쓰자는 의견을 살펴보면 대중적으로 쓰이는 용어다, 어떤 용어든 쓰이면 그만이다, 신조어로 써도 좋을 만큼 마음에 든다, 언어는 절대적이지 않다, 제로백은 보편화된 지 오래다, 언어는 전달이 목적이다…등 다양합니다.

이 사안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잘못된 단어다 보니 안 쓰는 게 좋다는 것은 알겠으나, 현실적으로는 널리 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이죠. 개인적으로 제로백은 이미 못 쓰게 하기 불가능한 단어가 됐다고 생각됩니다.

논의가 필요합니다. 제로백을 쓰는 게 거슬리는 사람은 이를 충분히 대체할 새로운 단어를 제시해야 할 겁니다. 댓글에 적은 ‘발진가속’이든 ‘정지가속’이든, 아니면 대댓글에 나온 ‘영백’이든 ‘0-100km/h’든 말이에요. 어느 정도 합당한 표현이 나온다면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질 겁니다. 제로백이 잘못된 단어라는 문제 인식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충분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대체할 단어가 마땅히 없는 게 문제죠.

다만, 제로백을 쓴다고 무개념, 또는 비전문가로 치부하는 분위기는 없어야 하겠습니다. 극단적인 양분화는 사회적 합의를 어렵게 만듭니다. 평생 제로백에 둘러싸여 살기 싫다면 조금 더 현명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전승용

전승용 칼럼니스트 : 모터스포츠 영상 PD로 자동차 업계에 발을 담갔으나, 반강제적인 기자 전업 후 <탑라이더>와 <모터그래프> 창간 멤버로 활동하며 몸까지 푹 들어가 버렸다. 자동차를 둘러싼 환경에 관심이 많아 여기저기 킁킁거리며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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