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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가을, 그렇게 부가티는 화려한 부활을 선언했다
기사입력 :[ 2019-02-25 11:51 ]


세계 최고가 자동차 부가티가 애써 부정하는 슈퍼카
베이론 이전의 슈퍼 부가티, EB110 (2)

(1부에서 이어집니다)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부가티의 기술개발이 실제로 시작된 것은 디자인 경합이 벌어지기 1년 전의 일이였다. 목표는 뻔했다. 최고, 무조건 최고였다. 걸작 람보르기니를 통해 그 이름을 각인시킨 파올로 스탄자니는 부활한 부가티에 당대 레이스 엔지니어링의 모든 것을 담으려 했다. 기본 형태는 그가 경험적으로 체득한 이상적인 슈퍼카의 형태를 따랐다.

길이 ‘4.1미터’에 12기통 엔진과 6단 변속기가 세로 배치되는 구조와 종래와 달랐던 것은 4륜구동 시스템이 탑재되었다는 것. 새로 설계한 3.5리터 V12엔진의 목표출력은 8000PRM에서 560마력, 토크는 60kg.m가 넘었다. F1에 막 도입되었던 티타늄제 5밸브 구조에, 양쪽 뱅크별로 두 개씩 총 네 개의 터보를 적용한 쿼드터보 시스템이 제작된다. 베이론이 등장하기도 전에 쿼드터보 부가티는 이미 만들어졌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1988년의 이야기다) 능동형 서스펜션에 카본 디스크 브레이크라는, 지나치게 시대를 앞선 방식도 검토되었지만, 목표로 한 1991년 발매를 맞추려면 차기모델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개발의 전 과정이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부가티는 프랑스제로 비추어질 필요가 있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부가티의 정체성 함양을 위해 프랑스의 최일류 기업들이 투입된다.

- 아에로스파시알(Aérospatiale):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와 아리안 로켓의 제작사. 섀시 제작을 맡겼다.
- 미쉐린(Micheline): 타이어 세계의 요지부한 1위는 마침 프랑스회사이기도 했다. 370km/h를 버틸 수 있는 타이어 제작이 미션으로 떨어진다.
- 엘프(elf): 프랑스를 대표하는 정유그룹 토탈(Total)의 윤활유 브랜드. 그때는 독립회사였다. F1의 엔진오일을 다루던 회사에게 370km/h에서도 유막이 유지되는 오일을 만드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지도.

그렇다고 해서 프랑스에만 ‘몰빵’한 차는 아니었다. 최고를 지향한 차였던 만큼, 최고에 걸맞은 제품이라면 다른 나라 것도 가져다 썼다. 휠과 댐퍼는 독일의 BBS와 삭스(SACHS)에서 조달했고, 터빈과 오디오시스템은 일본의 이시카와지마-하리마(IHI)와 나카미치를 통해 받았다.

1988년 10월, 최종 완성된 섀시 도면이 아에로스파시알에 전달된다. 완성된 초도 알루미늄 섀시가 도착할 즈음인 1989년의 봄, 부가티의 부활을 알리는 V12엔진이 90년 만에 폭음과 함께 시동에 성공한다.



◆ 스탄자니의 이탈, 그러나 계속되는 개발

초도 제작된 7대의 섀시를 기반으로 최종 선택된 간디니의 디자인을 입힌 5대의 프로토타입이 제작되고, 동력계통과 에어로 다이나믹스 테스트가 시작된다. 모종의 이유로 아르티올리는 이 차의 발매를 무조건 1991년 9월로 못 박은 상태. 빠듯한 일 정속에 개발이 진행되던 중, 개발총괄인 파올로 스탄자니가 ‘일신상의 이유’로 프로젝트에서 하차한다. 자신의 방식에 확신을 가지고 있던 명 개발자로서, 그는 개발의 세부사항까지 사사건건 간섭하는 아르티올리의 전횡에 큰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와중에 디자인이 마음에 안들어 뒤집어엎겠다는 아르티올리의 폭탄선언이 나오고, ‘동지’ 간디니가 이탈해 버리는 사태가 터진 것이다.

이제까지의 고생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없었던 그는, 아르티올리의 영향력을 줄일 방법을 은밀히 추진한다. 자신의 보유지분과 함께 주변 사람들의 회사지분을 끌어 모아 ‘물주’에게 대항해 보려던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그만 아르티올리에게 딱 걸리고 만다. 머리끝까지 열 받은 아르티올리는 스탄자니에게 제 발로 나갈 것을 종용한다. 부가티 부활을 위해 의기투합한 멤버는 이제 모두 프로젝트를 떠난 것이다. 아르티올리는 다른 개발자를 수배한다. 중간에 맡게 된 대형 프로젝트에 압박을 느낄 법도 했건만, 이들의 면면은 스탄자니와 동급, 아니 그 이상이었다. 페라리F40의 아버지, 니콜라 마테라치(Nicola Materazzi)와 아우디 콰트로 시스템의 개발자 파벨 라즈미스(Pavel Rajmis)가 바로 후속개발을 지휘하기 시작한다.



발표까지 고작 1년 남짓 남은 상황에서 개발자와 디자인이 모두 뒤집어진 상황. 우왕좌왕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본사 건물을 디자인했다가 얼떨결에 차까지 맡게 된 아르티올리의 사촌이 손본 모습은 구조적인 변화를 최소화한 수준에서 아르티올리의 요구를 담은 것이었다. 날선 모서리를 모두 깎아낸 둥근 차체는 전면부의 면적이 커지고, 고정식 헤드라이트가 달렸으며 ‘클래식’하게 마무리한 뒷모습이 특징이었다. 에어로 다이나믹스를 망치지 않는 수준에서 부가티의 상징 ‘말발굽’ 형상도 조그마하게 들어간다. 간디니가 있을 때에는 씨알도 안먹히던 요구였지만 이 ‘말발굽’이야말로 아르티올리가 원하던 ‘화룡점정’이었다. 부가티 사생팬인 아르티올리에게 말발굽 그릴이 없는 부가티는 부가티가 아니었을 테니.



미쉐린이 가져온 초도 17인치 MXX 타이어는 560마력에 이르는 엔진의 출력을 받아 내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편평율을 낮추자는 제안에 따라 18인치 30시리즈로 변경된 325mm 타이어가 비로소 성능을 충족시키게 되지만, 높아진 그립은 알루미늄 섀시의 강성부족을 불러온다. 남은 시간은 거의 없는 상황, 섀시를 처음부터 뜯어고쳐야 할 지경에 처한 마테라치에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섀시 제작사 아에로스페시알이었다. 그들은 당시 항공기 구조물로 어느 정도 연구가 진행된 카본파이버를 도입해 강성문제를 해결할 것을 건의한다. 그리고 실제로 제작된 카본 섀시가 두 배의 비틀림 강성을 가졌음을 확인하자, 이것을 기반으로 한 개발이 속행된다. 이제 시간이 거의 없었다.



철야에 철야를 거듭한 끝에, 겨우 한 대의 차가 날짜를 맞춘다. 1991년 9월 14일 파리의 한복판, 5000여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프렌치 블루로 치장한 새 부가티가 모습을 드러낸다. 정확히 에토레 부가티의 탄생 110주년이 되던 날, 부가티의 부활을 선언한 차의 이름은 ‘EB110’로 발표된다.

발매일에 그토록 집착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이 날을 위해 맞춰진 차 이름 때문이었다.



(3부에서 계속 됩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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