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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스카에 뿌리를 둔 50대 한정판’ 그 신화의 시작
기사입력 :[ 2019-05-07 13:04 ]


재규어의 숨겨진 슈퍼카 XJR-15 (2)

(1부에서 이어집니다)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XJ220과는 달리 XJR-15라는 이름에는 특별한 뜻이 없었다. TWR이 1991년을 목표로 만들던 르망 레이스 머신 XJR-14 다음으로 이름을 붙인 것이 다였다. 도로법을 지킬 상하향 헤드라이트나 깜박이, 파킹 브레이크 같은 장비는 모두 달려 있었지만, 그 속을 채운 것은 그룹 C 레이스 머신 XJR-9의 기계적 구성 그대로였다. 카본-케블라 복합재 구조의 섀시를 다시 카본제 외피로 감싼 뒤, 정중앙에 거대한 엔진을 넣고, 레이스카와 동일한 구조의 푸시로드식 서스펜션을 장착했다. 벤추리 효과를 통해 접지력을 높이는 하부 에어로 터널, 엔진과 변속기가 차체의 일부가 되어 후부 강성을 담당하는 방식도 똑같았다.

변속기는 오직 수동 뿐, 5단과 6단 두 가지로 준비된다. 두 변속기의 가장 큰 차이는 단수가 아닌 싱크로메시의 유무. 도로주행이 목표라면 싱크로메시를 통해 부드럽게 변속되는 5단을, 레이스에서만 즐길 용도라면 ‘도그미션’의 6단을 선택하도록 한 것이다. 앞 9.5J×17+245/40ZR17, 뒤 13J×18+335/35ZR18의 타이어는 원래 굿이어에서 받기로 되어 있었지만, 온로드는 물론 레이스용 슬릭과 웻 타이어를 따로 준비하라는 요구는 이 사이즈의 타이어 몰드가 따로 없던 굿이어에게 신규 개발을 필요로 했다. XJ220용 타이어를 만들던 브리지스톤에 추가 타이어 개발 오더가 떨어진다.



뭐니뭐니해도 이 차의 정수는 엔진이었다. 정확하게는 WEC가 아닌 미국 IMSA용 GTP 사양으로 개발된 6리터 자연흡기 V12 SOHC 24V밸브 엔진은 11:1의 높은 압축비와 자이텍(Zytek)의 전자제어 연료 분사장치를 통해 최고 출력 456ps/6,250rpm, 최대 토크 58kgm/4,500rpm를 냈다. 과급기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700마력이 넘는 힘을 내던 엔진이 이만큼이나 디튠된 것은 장기 내구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ABS도 트랙션 컨트롤 없는 무게 1050kg의 차를 몰게 될 대부분은 전문 레이서의 경험과 훈련이 없는 일반인들이었다. 모처럼 만든 슈퍼카가 ‘과부제조기’로 악명을 떨치게 되는 일은 막아야 했다.



폴리카보네이트제의 투명스크린을 끼운 초경량 힌지 도어를 열면, 거기에는 30cm가 넘는 두터운 카본 제의 사이드 실이 나온다. 타고 내리는 과정부터가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들어가고 싶다면, 우선 다리 둘부터 모두 넣고 몸을 꼬며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당시 거의 모든 차들이 최대 시장 미국을 노리고 있던 것과 달리, XJR-15는 아예 처음부터 미국 도로인증을 포기했다. 현재의 레이스용 V12엔진으로는 무슨 짓을 해도 미국의 배기인증을 받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XJR-9을 따라 오직 오른쪽 운전석 사양(RHD)만 마련되었으며, 왼쪽사양(LHD)은 검토도 하지 않았다. 기계적인 변화는 단 한 가지, 파워스티어링이 추가된 것뿐이었다. 이것만큼은 꼭 달아줘야 한다는 예비 고객들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 에어컨은 없었으며, 주행 중에는 탑승자의 얼굴을 향해 사정없이 열풍이 뿜어져 나왔다. 방음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레이스용 V12 엔진이 퍼붓는 어마어마한 폭음은 여과 없이 실내에 몰아쳤다. 고함을 지른 들 옆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디오는 없었지만, 헤드폰이 달려 있던 것은 순전히 탑승자 사이의 ‘대화’를 위한 것이었다.



이미 평범하게 도로를 달리기에는 글러먹은 차였지만, 그것은 XJR-15의 고객이 원한 것이기도 했다. 평범한 슈퍼카라면 이미 질리도록 타본 사람들이 가지고 싶었던 것은, 훨씬 원초적인 과격함을 유지한 울트라 하드코어 머신이었다. XJR-9의 달리기 경험을 고스란히 선사해 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도로 등록 가능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49만파운드 (2019년 물가 환산 시 약 20억원)를 일시불로 지불할 수 있는 슈퍼리치들에게 XJR-15는 새로 들인 한정판 콜렉션 중 하나일 뿐이었다. 정 달려보고 싶다면 그냥 서킷을 통째로 임대해 달리면 그만일 뿐이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의 XJR-15를 가져다가 원메이크 레이스까지 즐겼다.



◆ XJR-15만의 파티, 재규어 인터컨티넨탈 챌린지

첫해 XJR-15을 수령한 오너는 구입시점에서 ‘1991 재규어 스포츠 인터콘티넨탈 챌린지’ 참가를 제안 받았다. 그 해의 F1 레이스 사전 행사로 벌어질 XJR-15 원메이크 행사에 출전하는데 필요한 것은 오직 추가비용뿐. 운송과 운영, 정비는 모두 재규어가 직접 알아서 하고, 차주는 몸만 가면 되는 조건이었다. 레이스가 벌어질 세 곳은 모나코, 실버스톤, 스파 프랑코샹 세 곳. F1에서도 가장 유명세 높은 서킷들이긴 하지만, 명색이 인터컨티넨탈 (대륙간) 레이스가 서유럽에만 집중된 것은 원래 들어오기로 했던 일본 쪽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진 탓이었다. 직접 운전을 해도 되지만, 그게 부담스러우면 대신 달려줄 드라이버까지 섭외해 주기도 했다. 모두 16대의 차가 출전을 확정짓는다.

재규어의 슈퍼카 레이스는 첫 레이스인 모나코에서는 이목을 끌었다. 그렇게 재규어 이미지가 좋아져 매출이 확 올라갔다면 모두 해피엔딩이었겠지만, 일이 그렇게 잘 풀렸을 리가 있나. 아마추어와 프로 드라이버를 뒤섞어 출발시킨 레이스는 시작부터 엉망진창으로 전개된다. 16대 중 11대가 크고 작은 충돌에 휘말려 파손되었고, 그 중 여섯 대는 아예 박살이 나서 리타이어 해야 했다.



두 번째 레이스인 실버스톤에서도 졸전이 이어지자, XJR-15에 대한 관심이 뚝 떨어진다. 다급해진 재규어는 우승 상금을 왕창 끌어 올린다. 우승 부상으로 주던 XJS 대신 최종장에 무려 미화 100만달러 (2019년 물가 환산 시 약 21억원)를 건 것이다. 치열한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지만, 상황은 더 꼬여만 간다. 느슨하게 달리던 고용 레이서들이 담합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니가 9번을 잘 막아 주면 내가 상금 반띵해 줄께. 어때?’

담합 이야기는 당연히 재규어의 귀에도 들어갔다. 분위기가 더러워지자 특단의 조치가 내려진다. 원래 20랩이 예정되어 있던 레이스를, 언제 체커기가 올라갈지 모르는 랜덤 레이스로 바꿔 버린 것이다. 한 바퀴만 돌지 스무 바퀴를 돌 지 모르는 상황에서, 큰 상금을 앞둔 레이스는 과열양상으로 전개된다. 마지막 한 대가 남을 때까지 ‘몸빵’에 고의 추돌이 이어지는 막장, 디스트럭션 더비(Destruction Durby)를 연상시키는 난폭한 레이스를 지켜보던 재규어는 11랩 만에 체커기를 올린다. XJR-15의 원메이크 레이스는 1년 만에 사라졌다. 울상이 된 재규어만 남겨 놓은 채.



◆ XJR-15, 성공인가 실패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XJR-15는 성공적인 프로젝트였다. 원래 목표인 50대를 넘어 총 53대가 만들어졌고, 모두 고객에게 전달됐다. 예정보다 수량이 조금 더 늘어난 것은 계획에도 없던 리미티드 에디션 덕분이었다. XJR-15의 디튠된 엔진이 불만족스럽던 일본의 고객은 자신의 차에 르망 사양의 7리터 V12 엔진 탑재를 결국 관철시킨다. 배기량을 7.4L로 확대한 뒤 710마력의 출력을 내는 차는 XJR-15LM라고 명명되었다.

XJR-15의 성공은 ‘레이스카에 뿌리를 둔 50대 한정판’ 이라는 초기 하이퍼카의 유형을 만들어냈다. 몇몇 회사가 그들의 모델을 따라 차를 만들었고, 대부분 망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차가 슈판962CR이였다. (관련기사: 링크첨부) 재규어와 달리, 포르쉐의 그룹C카를 기반으로 한 시도는 좋게 끝나지 못했다.



당대 레이싱의 하드웨어를 고객과 직접 공유하려 했다는 것만으로도 XJR-15는 진귀한 존재다. XJR-15은 생산 목표를 달성했지만, 정작 슈퍼카로서의 존재감은 엷기만 하다. 대중의 머릿속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지 못한 차는, 그저 레어 아이템 취급을 받으며 누군가의 차고에 잠들어 있다. 반면 목표량을 채우지 못했으며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으로 간주되는 XJ220은 오늘날까지도 재규어를 대표하는 슈퍼카로 재조명되고 있다.

XJ220과 XJR-15. 성공과 실패는 과연 어느 차의 몫일까?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변성용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13년간 객원기자로 글을 썼다. 파워트레인과 전장, 애프터마켓까지 자동차의 다양한 분야에서 업무를 수행하며 자동차를 보는 시각을 넓혔다. 현재 온오프라인 매체에 자동차 관련 글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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