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크, ‘베이비 벨라’ 취급 받을 바에는 차라리... [올해의 자동차]

2019-12-23     전승용
<구관이 명관> : 이보크
레인지로버 이보크, 좋은데 다 좋은데 예전 스타성이 아쉽다



◆ 다음 자동차 칼럼니스트들이 뽑은 2019년 올해의 자동차

(3) 구관이 명관 -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이보크

“왜 저에게 어려운 거 주셨어요? ㅠㅠ”

다음자동차 ‘올해의 차’ 주제를 받고 관계자에게 소심하게 항의(?) 문자를 보냈습니다. 평소 ‘세상에 나쁜 차는 없다. 먼저 나온 차보다 나중에 나온 차가 더 좋다’고 생각하며 기자 생활을 해왔는데, 난데없이 ‘구관이 명관’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으니 조금 당황스럽더군요.

역대로 따지면 몇몇 모델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올해 출시된 차 중에서는 딱히 생각나는 모델이 없었습니다. 슬픈 예감을 안고, 제가 소속된 모터그래프 홈페이지에 들어가 ‘출시’라는 키워드를 넣고 기사를 검색했습니다. 올해도 정말 많은 신차가 출시됐고 역시나 각자의 장점을 잘 살려낸, 이전 모델보다 상품성이 훨씬 더 좋아진 모델뿐이었습니다. 슬픈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습니다.

몇 번을 돌려봤는지 모릅니다. 혹시라도 제 섣부른 판단 때문에 누군가가 피해를 보면 안 되기 때문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뭐,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구관이 명관’인 차를 찾아내질 못했습니다. 약간의 아쉬운 점이 발견됐지만, 어떤 이유로든 이전 모델보다 더 좋아진 게 사실이니까요.



서두가 이렇게 길어진 이유는 그만큼 찾기가 어려웠다는 것이고, 제가 선정한 ‘랜드로버 레인지로버 이보크’도 이전보다 안 좋은 모델이라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변명을 대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의견은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아쉬움에 불과하다는 말씀도 드립니다. 신형 이보크 오너 분이나 랜드로버 관계자들이 상처받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기억을 더듬어보겠습니다. 이보크가 국내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11년 서울모터쇼였습니다. 그때의 충격과 감동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육중한 덩치에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남성미 폴폴 풍기던 레인지로버에서 이렇게 슬림한 수트 차림의 이보크를 출시할 줄은 몰랐거든요. 이미 해외에 공개된 사진으로 충분히 봤지만, 막상 실물을 보니 더 멋있고 섹시한 차라고 느껴졌습니다. 새롭게 부상하는 여성 고객 및 젊은 남성 소비자들을 공략하기 충분한 모델이었죠.



지금은 5도어 모델만 판매되고 있지만, 처음에는 쿠페형 3도어 모델도 있었습니다. 이 3도어 모델은 컨버터블을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SUV였습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랜드로버는 몇 년 후 이보크 컨버터블을 내놨고요. 시간이 흐른 지금이야 색다를 것 없겠지만, 당시로써는 매우 파격적인 행보였습니다.

실내 역시 당시 판매하던 레인지로버보다 더 세련된 모습이었습니다. 이보크 실내 디자인은 빅토리아 베컴이 참여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딱딱하게 각진 센터페시아에 큼지막한 버튼이 성큼성큼 붙어 있던 레인지로버와 달리, 이보크는 부드러운 센터페시아에 잘 정리된 버튼이 똑똑하게 배치돼 있었습니다.

주행 성능도 발군이었습니다. 2.0~2.2 4기통 가솔린 및 디젤 엔진을 활용해 조용하고 빠르게 달렸습니다. 기존 랜드로버와 달리 도심형 SUV로 만든 만큼, 안정적으로 속도를 올리고 코너를 돌고 멈췄습니다. 스포트 모드에서의 변화 폭도 컸고, 중고속 이상의 영역에서도 발군의 주행 능력을 보였습니다. 여기에 전자식 트랙션컨트롤, 힐디센트 어시스트, 서라운드뷰 카메라, 50cm 도하 등 오프로드 주행을 위한 다양한 기술도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다재다능한 이보크였지만, 이보크의 진정한 가치는 랜드로버 변화의 시작이었다는 겁니다. 랜드로버가 이보크를 통해 보여준 새로운 모습은 레인지로버뿐 아니라 랜드로버 전 라인업에 순차적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최상급 모델인 신형 레인지로버뿐 아니라 랜드로버 브랜드의 신형 디스커버리도 모두 이보크에 적용된 디자인 언어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신형 이보크에 아쉬움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국내 첫 공개 이후 8년 만에 ‘2019 서울모터쇼’에 등장한 새로운 이보크는 제가 1세대 이보크에서 경험했던 충격과 감동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물론, 신형 이보크는 이전 모델보다 모든 면에서 좋아졌습니다. 외관 디자인은 전자식 도어 손잡이와 매트릭스 LED 헤드램프 등을 적용해 더 세련되게 꾸몄고, 더 넓어진 실내는 디지털 디스플레이와 클리어 사이트 룸미러, 클리어 사이트 그라운드뷰 등 첨단 기술을 탑재했습니다. 파워트레인도 48V 마일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적용했고, 인제니움 파워트레인의 성능과 완성도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전자동 지형반응 시스템2와 전 지형 프로그레스 컨트롤 등 온로드 및 오프로드에서 보다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는 주행 보조 기술도 들어있고요.

하지만, 1세대 이보크가 가지고 있던 위상은 새로 등장한 벨라에게 빼앗긴 듯합니다. 2세대 이보크가 나올 때의 기사를 찾아보면 ‘베이비 벨라, 아기 벨라, 작은 벨라’ 등 이보크가 마치 벨라의 마이너 버전이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신형 이보크에 들어간 신기술은 대부분 랜드로버가 벨라를 통해 먼저 보여줬던 것입니다. 물론, 랜드로버(레인지로버 포함) 최초로 48V 마일드하이브리드 시스템을 탑재하는 등 몇몇 독창적인 변화도 있지만, 나머지는 벨라에서 봤던 익숙한 것들입니다. 전자식 도어 손잡이도, 헤드램프 디자인도, 디지털 디스플레이도요.

물론, 신차의 변화는 기술의 개발 시점과 출시 일정이 맞물려야 됩니다. 그러나 이는 랜드로버의 브랜드 전략에 따라 충분히 조절 가능합니다. 아마 랜드로버는 새롭게 추가되는 벨라에 더 많은 신경을 썼고, 이보크를 처음 내놨을 때처럼 온갖 첨단 신기술을 적용했을 겁니다. 이보크가 그랬던 것처럼 벨라를 통해 충격과 감동을 주려 했고, 충분히 성공했습니다. 뭐, 이보크보다 벨라가 더 많이 팔리는 게 수익적으로 더 좋겠고요.

그래서 더 아쉽습니다. 레인지로버(브랜드)를 대표하는 모델은 누가 뭐래도 레인지로버(차)지만, 이보크는 레인지로버(브랜드)의 아이콘 같은 모델입니다. 벨라에 밀려 그저 그런 모델이 돼서는 안 되는 차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베이비 벨라’ 취급을 받을 바에는 더 파격적이고 더 스타일리시하게 만드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레인지로버 라인업의 대(레인지로버, 레인지로버 스포츠)-중(벨라)-소(이보크)에서 ‘소’를 맡기는 게 아니라, 대(레인지로버)-중(레인지로버 스포츠)-소(벨라)로 구성하고 이보크는 별도의 아이코닉 모델로 발전시키는 방향으로요.



이보크는 처음 출시했을 때부터 꽤 큰 가격 저항을 받은 모델입니다. 아무리 프리미엄 SUV 브랜드라지만, 엔트리 모델의 가격이 9,000만원(2011년 출시 당시 최고급 모델)이나 되는 게 말이 되냐는 것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보크는 꾸준히 일정 판매량을 유지하는 모델입니다. 나름의 마니아층도 가지고 있고요.

선택과 집중을 통해 더 멋진 모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내외 디자인을 조금 더 소비층에 맞게 특화시키고, 오프로드 주행 기술 등 도심형 SUV에 없어도 되는 사양을 과감히 빼고 가격을 낮추는 방향으로 바뀌면 어떨까 싶네요. 1세대가 그랬던 것처럼 레인지로버의 아이콘 겸 엔트리 모델로서 브랜드 접근성을 높이는 좋은 모델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뭐, 레인지로버는 전혀 그럴 뜻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요.

자동차 칼럼니스트 전승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