큼직하고 안전한 차? SUV에 대한 몇 가지 오해
2017-03-06 나윤석
SUV, 과연 돈을 더 내고 불편 감수할 만큼 매력적일까
[나윤석의 독차(讀車)법] ‘자동차는 어른들의 장난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동차처럼 어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물건도 없다는 뜻일 겁니다. 비록 중고차였지만 생애 첫 차를 갖게 되었을 때의 마치 아머 슈트를 입은 아이언 맨이 된 듯한 자부심으로 흥분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 말을 고쳐야겠네요. 자동차는 어른들을 아이처럼 만드는 요물이라고요.
이렇듯 자동차는 성인들이 감정을 이입하기 좋은 대상입니다. 그래서 차를 선택할 때는 흥분 상태에 빠지기 쉽습니다. 대부분 ‘이 차 어때?’라고 물어보는 친구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이 모델로 결정했어. 친구야 그렇다고 말해줘!’라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야 그 차를 왜 사니?’라고 대답했다가 정색하고 돌아서는 친구를 보고 의아해했던 경험이 한 번 쯤은 있으셨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마음을 뺏긴 사람이 동의를 구하는 질문 아닌 질문이었던 겁니다.
이렇듯 재산목록 2호 혹은 비공식 애인을 선택하는 자동차 고르기는 내가 침착하지 않고 정신을 먼저 빼앗겨버리면 그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첫 눈에 반해서 눈에 콩깍지가 꼈다가 차를 출고한 다음에 정신을 차려도 소용이 없는 것이지요. 매일 만나는 자동차가 보기도 싫다면 정말 불행할 겁니다. 결국은 커다란 금전적 손해를 보고 되팔거나 정을 붙이지 못하다 차를 막 타다가 서로 고생만 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인생을 좌우하는 배우자를 맞이할 때도 침착해야 합니다.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습니다. 제가 그렇다는 뜻은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마셔요.
오늘의 질문은 SUV, 정확하게는 크로스오버 유틸리티 차량 (CUV)를 선택하려는 분들에게 드리는 질문입니다. 참고로 CUV는 일반 승용차를 바탕으로 차체를 키우고 들어 올려서(?) SUV 모양으로 만든 요즘 우리 주변에 있는 거의 모든 SUV들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프 랭글러나 기아 모하비처럼 SUV 전용 프레임 차체를 사용하는 대신 승용차 플랫폼을 비탕으로 하는 모델들이죠. 그러니까 오프로드를 본격적으로 달릴 목적은 애당초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질문 드릴게요. 만일 당신이 SUV를 마음에 두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큼직한 차체가 안전할 것 같아서 인가요? 승용차보다 높은 시트 포지션 덕택으로 시야가 시원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아이가 있는 가족에게는 유모차와 카시트를 위한 넓은 실내 공간과 적재 공간이 SUV를 선택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족들과 좀 더 레저를 즐기고 싶은 마음, 혹은 그럴 여유가 없지만 자동차라도 SUV를 가지면 만족이 될까 하는 마음도 솔직히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바로 요즘 가장 핫한 대세 아이템이 SUV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이유가 얼마나 합리적인지는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SUV를 선택한다는 것은 상당히 값비싼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중형 세단인 쏘나타와 동급인 SUV는 싼타페입니다. 정확하게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쏘나타 1.7 디젤의 가격은 2천5백에서 3천만원인 반면 싼타페 2.0 디젤 2WD 모델은 이보다 3백만원 비싼 2천8백에서 3천3백만원입니다. (싼타페의 높은 출력과 쏘나타의 듀얼 클러치 변속기의 가치를 상쇄하면 가격차는 거의 그대로 유지됩니다.)
쏘나타와 가격이 거의 같은 SUV는 오히려 싼타페가 아니라 한 등급 낮은 투싼입니다. (1.7 디젤 가격 2350~2800만원) 수입차의 경우도 비슷해서 메르세데스 벤츠 GLC의 가격은 C 클래스가 아니라 E 클래스와 맞먹을 정도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쏘나타의 연비는 투싼보다도 10%, 싼타페보다는 20% 이상 경제적입니다. 이래저래 SUV를 선택하는 것은 대가가 만만치 않습니다.
SUV의 큰 차체가 안심되는 면은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무게중심이 높고 무거운 SUV는 조종 성능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SUV의 조종 성능이 떨어진다는 것은 같은 상황에서 승용차보다 사고가 일어날 위험이 높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높은 곳에 앉으면 흔들림도 심해서 승차감도 좋지 않습니다. 같은 엔진으로 기름을 더 사용해도 무거운 차체 때문에 동력 성능은 떨어집니다. 게다가 SUV답게 4륜 구동이라도 선택하면 그 차이는 더 커집니다.
적재 공간의 경우도 의외로 SUV는 우세하지 않습니다. 리터로 잰 용적에서는 천정 아래까지 실을 수 있는 SUV가 우세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안전하게 뒷시트 등받이 높이까지만 잰다면 뒤 오버행이 짧은 SUV가 오히려 불리합니다. (C 클래스 480리터, GLA 421리터) 게다가 세단의 깊은 트렁크는 짐을 바닥에 펴서 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비하여 SUV는 2층으로 쌓아 올려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전그물이 없으면 위험할 수 있고 그물이 있더라도 뒤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차체가 높아서 짐을 높이 들어 올려야 한다는 점이나 객실과 적재함이 구분되지 않아서 김장김치의 냄새가 실내로 들어온다는 사소한 불편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이쯤 되면 ‘혹시 나윤석 씨는 SUV가 싫어서 트집을 잡으시는 건가요?’라고 반문하실 분들이 계실 겁니다. 대답을 드리자면 저는 SUV를 살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SUV가 싫기 때문은 아닙니다. 단지 저에겐 돈을 더 지불하고 불편을 감수할 만큼 SUV가 절실하지는 않기 때문일 뿐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SUV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면, 그리고 SUV를 갖는 것만으로도 자신과 가족이 행복하다면 지금까지의 논리적 이야기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자동차는 어른들의 장난감이니까요. 애인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잠시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 뿐입니다. 당신은 ‘왜’ 이 차가 필요한가요? 스스로를 설득해 보세요. 성공하셨다면 사십시오. 실패하셨더라도 갖고 싶어 죽겠다면…… 당연히 새로운 애인이나 가족으로 맞아들이십시오.
자동차 칼럼니스트 나윤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