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선 신뢰 잃었지만...미워할 수 없는 피아트 500
2017-06-08 안민희
이탈리아에 대한 환상에 불을 붙이는 피아트 500
[안민희의 드라이브 스토리] 이탈리아하면 어떤 자동차가 떠오르시나요? 페라리, 마세라티가 가장 먼저 생각나네요. 모터스포츠 마니아라면 알파로메오나 란치아 아닐까요? 하지만 피아트 500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요즘 나오는 신형 500에 대한 평가는 아쉽습니다만 옛 모델인 누오바 500은 이탈리아에 대한 환상에 불을 붙이지요. 오늘의 이야기, 시작합니다.
루팡 3세 등 만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작고 귀여운 피아트의 이름은 누오바 500이다. ‘누오바(Nuova)’는 이탈리아어로 ‘새로운’을 뜻하니 해석하자면 ‘신형 500’이란 의미다. 누오바 500 등장 이전에도 500이 있었다. 1937년 등장해 1955년 단종된 차다. 생쥐 이빨처럼 길게 튀어나온 그릴 덕분에 이탈리아어로 ‘생쥐’를 뜻하는 ‘토폴리노’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누오바 500은 기존의 이름을 이어받았지만 완전 다른 신차로 거듭났다. 실내 공간을 더 넓게 쓰기 위해 기존의 앞 엔진 구조를 버리고 폭스바겐 비틀처럼 뒤 엔진 구조로 바꿨다. 누오바 500의 크기는 길이 2.97m, 너비 1.32m, 높이 1.32m, 휠베이스 1.84m다. 공차중량은 499㎏로 아주 가벼웠다. 직렬 2기통 0.5L 엔진은 최고출력 13마력을 냈다.
이탈리아 자동차답게 낭만을 위한 직물 지붕도 달았다. 사실 지붕을 철제로 덮는 것보다 직물로 덮는 쪽이 비용이 적게 들어서라는 이유가 컸지만. 지붕을 뒤로 가지런히 접어 넘기면 하늘이 보이는 방식이다. 그리고 에어컨 없던 시절임을 고려하면 오히려 지붕 여는 자동차가 실내 환기 등 여러모로 낫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든다.
누오바 500은 유럽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실제로 누오바 500을 타봤을 때 실내 공간은 오리지널 미니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합리적인 패키징과 귀여운 디자인의 힘을 빌려 크게 성공했단 생각이다. 피아트는 누오바 500이 인기 모델로 자리잡자, 계속 디자인을 살짝 변경하며 다양한 모델을 만들었다.
500을 기반으로 뒤를 늘려 왜건을 만든 500 쟈르디네라(Giardiniera), 500을 밴으로 만든 푸르곤치노(Furgoncino), 1965년부터 생산된 베를리나(Berlina), 1968년 생산된 루소(Lusso) 등 조금씩 사양을 바꿔 팔았다. 스포츠 버전도 만들었다. 엔진 블록은 그대로 두고 배기량을 479㏄에서 499.5㏄로 살짝 늘렸다.
튜닝 전문 업체 아바스(Abarth)도 피아트 500을 손봐 아바스 595, 아바스 695 등의 모델을 내놓았다. 작은 엔진을 맹렬하게 돌려 달리는 튜닝을 즐겨하는 아바스의 특징을 생각해보면 500은 훌륭한 캔버스였다. 절정의 인기를 누린 누오바 500이었지만, 후속작인 피아트 126을 위해 바통을 넘긴다. 누오바 500은 1957년부터 1975년까지 모두 389만3,294대가 팔렸다.
이후 피아트는 오랫동안 500을 봉인했다. 허나 2000년대 초반부터 자동차 업계를 강타한 복고의 열풍 앞에 500의 부활을 결정했다. BMW 미니, 폭스바겐 뉴비틀, 포드 머스탱 등 과거에서 모티브를 따온 다양한 모델들이 인기를 누릴 때였다. 피아트는 누오바 500이 등장한지 50년 만인 2007년 신형 500을 내놓았다.
신형 500은 누오바 500의 스타일링과 역사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러나 구동계는 앞 엔진 앞바퀴 굴림을 택해 소형차 만드는 최신 방식에 맞췄다. 엔진은 과거 엔진의 두 배 가까이 되는 직렬 4기통 1.4L 자연흡기 방식으로 키웠다. 디자인 테마는 물려받되 성능과 패키징 모두 현대에 맞게 꾸민 셈이다. 리메이크라는 말이 어울리는 이유다.
신형 500은 유럽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세계 여러 곳을 누비며 60여개 넘는 상을 받는 등 많은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처음에 비싸게 가격을 매기다 나중에 가격을 인하하는 등의 행동으로 신뢰를 잃어 고배를 마셨다. 한 번 잃어버린 신뢰를 다시 쌓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피아트 500이란 자동차 자체는 미워할 수는 없다. 역사와 디자인을 바탕으로 아이콘의 자리에 오른 차이기에 분명 다양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안민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