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르기니도 한 때는 슈퍼카만 챙기는 막장 회사였다

2017-08-23     황욱익


멋과 낭만, 열정이 가득한 이탈리아 자동차 (13)
최고를 향한 무거운 발걸음, 미래로 가고 있는 람보르기니 (1)

[황욱익의 플랫아웃]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할 거 없이 남자들이 가장 사랑하는 차를 꼽으라고 하면 대부분 람보르기니를 꼽는다. 2차 세계대전 후 군용차를 트랙터로 개조하는 사업으로 부를 쌓은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설립한 람보르기니는 탄생부터 지금까지 많은 자동차 마니아들의 꿈을 먹으며 성장해 왔다. 폭발적인 성능과 미래지향적인 디자인, 근육질 등 남성미 자랑하는 람보르기니가 페라리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페라리와 람보르기니는 그 성격이나 태생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

람보르기니 설립에는 페루치오 람보르기니와 엔초 페라리의 일화가 있다. 페라리 250의 팬이었던 페루치오가 클러치 문제를 발견하고 엔초를 찾아갔지만 문전박대 당했다는 일화이다. 람보르기니의 열정과 뿌리를 대변했던 이 일화는 한때 후세 사람들이 살을 붙인 일종의 구전동화처럼 떠돌다 몇 년 전 현 람보르기니의 CEO인 슈테판 빙켈만이 공식석상에서 설립 배경이 맞는다는 인증을 하기도 했었다. 사실 이탈리아 회사에는 이런 구전동화가(?) 많은 편이다. 동기 부여와 자존심 혹은 상품을 멋지게 포장하는 그들의 능력이 적절하게 뒤섞이면서 생기는 현상이다. 페루치오와 엔초의 일화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두 회사의 라이벌 의식(대부분은 후대 사람들이 만들어 낸)을 대변한다는 점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 굴곡이 많았던 역사

일화야 어찌되었든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볼로냐에 터를 잡고 자동차를 생산하기 시작한 시기는 1963년. 람보르기니의 첫 모델인 350 GT 카로체리아인 투어링에서 디자인을 담당하고 달라라에서는 만들 섀시에 람보르기니의 엔진을 올리는 방식으로 생산을 시작했다. 350 GT는 람보르기니 최초의 모델이기도 하지만 가장 못 생긴 람보르기니라는 평가도 받는다. 1964년에 양산에 들어가 1966년까지 생산된 350 GT는 120대만 만들어 졌으며 350 GTV와 400 GTV로 이어진다.

람보르기니와 슈퍼카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모델인 미우라는 1966년 등장했다. 764대가 만들어진 미우라는 그야말로 현대 슈퍼카의 기준을 정립한 최초의 미드십 모델로 베르토네에 재직 중이던 마르첼로 간디니가 디자인을 담당했다. 290km/h에 육박하는 최고 속력은 리어 액슬 앞쪽에 가로로 배치한 V12 엔진에서 만들어 졌고, 이후 쿤타치(카운타크)와 디아블로, 무르치엘라고, 아벤타도르 등으로 이어진 람보르기니 슈퍼카 라인업의 시초가 된다. 미우라는 람보르기니 뿐 아니라 자동차 역사에서도 현대적인 슈퍼카의 기준을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 미우라 이후 등장한 슈퍼카들은 대부분 미우라를 뛰어 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전세계의 자동차 평론가와 저널리스트들이 슈퍼카의 기원으로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애초에 생산량이 극히 적었던 람보르기니의 위기는 1970년대 오일쇼크와 함께 찾아왔다. 설립자인 페루치오는 1973년 람보르기니를 스위스의 사업가인 조르주 앙리 로세티에게 넘겼고 이후 람보르기니는 1978년 파산 후 밈란 형제(1984~1987), 크라이슬러(1987~1994), 메가텍(1994~1995), V파워 앤 마이컴(1995~1998)을 거쳐 아우디 그룹(1999)으로 주인이 바뀌게 된다. 아우디의 식구가 되기 전까지 람보르기니의 연간 생산량은 최대를 기록한 1991년이 고작 600대 남짓이다.



이 시기 에스파다(1968~1978), 이슬레로(1968~1969), 우라코(1973~1979), 쿤타치(1974~1990), 잘파(1981~1988), 디아블로(1990~2001) 같은 명차들을 발표했지만 생산량이 극히 적어 늘 적자에 시달렸다. 사실 1999년 아우디 그룹 산하로 들어가기 전까지 람보르기니는 그야말로 몇 종류의 슈퍼카만 발표한 경제성 없는 막장 회사나 다름없었다.



늘 적자에 시달리던 람보르기니와 달리 사업 수완이 좋았던 페루치오는 람보르기니를 떠나 와인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둔다. 람보르기니에서 그가 머물었던 시간은 10년 남짓으로 다른 자동차 메이커의 설립자들이 회사를 떠난 시간과 비교하면 매우 짧은 편이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람보르기니의 철학은 최근까지도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다. 가장 빠른 차를 만들겠다던 페루치오의 철학은 대량 생산과 경영 합리화의 선두주자인 아우디를 만나며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생산량도 늘어 소량 생산 메이커치고는 비교적 탄탄하게 자리를 잡았다. 무엇보다 람보르기니가 추구하는 방향은 빠른 차 외에도 희소가치와 혁신적인 디자인을 꼽을 수 있는데 과격하고 파격적인 디자인을 꼽을 때 항상 등장하는 단골손님이기도 하다.

2부에 계속

자동차 칼럼니스트 황욱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