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누가 한국에서 제 2의 폭스바겐이 될 수 있을까요?
2017-08-24 나윤석
시장을 들쑤시며 새로운 장르 퍼뜨릴 브랜드 절실한 시점
[나윤석의 독차(讀車)법]
1. 해치백 시장
“폭스바겐 골프가 사라진 것이 i30에게 도움이 될까요?”
작년에 출연했던 자동차 토크쇼에서 받았던 질문입니다. 저는 한 마디로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i30에게 좋지 않을 겁니다. 골프가 없으면 해치백 시장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제 예상대로였습니다. 우리나라 해치백 시장은 완전히 몰락했지요. 현대차는 핫 해치를 부르짖던 i30을 금년에는 방향을 확 바꿔서 아이유와 유인나 씨가 ‘달라~ 달라~’를 노래부르며 달콤하게 광고하고 있습니다. 마치 전혀 다른 차인 것처럼요. 그래도 결과는 도무지 나아지지 않습니다. 지금 가장 많이 팔리는 해치백이 어떤 모델인 줄 아십니까? 현대 아이오닉입니다. 전기차 바람과 함께 국내 최초의 친환경 전용 모델로 꽤 잘 팔립니다. 하지만 해치백이라고 생각하고 아이오닉을 결정한 분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결론 : 폭스바겐 골프와 함께 해치백 시장이 사라졌다.
2. 수입 컴팩트 SUV
폭스바겐 티구안은 2014년과 2015년에 수입차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던 모델입니다. 엔진 하나, 그것도 4륜 구동 파워트레인 하나로 1만대에 육박하기도 했습니다. 작년에 1등이었던 BMW 520d가 8천대를 넘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티구안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티구안이 사라진 결과 시장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수입 컴팩트 시장은 그대로 오그라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장을 메르세데스 벤츠 GLC나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스포츠와 같은 한 체급 높은 모델이 일부 흡수했습니다. 금년에는 푸조 3008SUV나 혼다 CR-V가 신차효과로 조금 회복하는가 싶지만 티구안의 기세를 복구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핫하다는 SUV 시장인데도 티구안의 부재는 회복하기 힘든 악재였던 겁니다.
결론 : 수입 컴팩트 SUV 시장 자체가 오그라들었다.
지금까지 두 모델을 예로 살펴보았습니다. 폭스바겐이 경쟁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이 칼럼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예로 들었던 두 모델과 장르에서 알 수 있듯이 폭스바겐의 퇴장은 시장의 관점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시장의 퇴행이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폭스바겐 골프가 사라지면서 해치백이라는 장르 자체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왜 비싼 돈을 주고 i30를 사냐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입니다. 하지만 골프는 왜 그렇게 많이 팔렸을까요? 2015년에 9천5백대나 팔렸군요. 디젤 게이트가 터지지 않았었다면 1만대를 넘었을 겁니다. 시장 점유율 15% 남짓의 수입차 시장에서 1만대가 팔렸다면 나머지 85%인 국산차 시장이었다면 산술적으로는 5만대 이상이 팔린 셈이 됩니다. 게다가 폭스바겐은 당시 수입차 시장 3등이었고 현대는 누가 뭐래도 국내 1위입니다. i30가 5만대 이상 팔린다? 누구도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믿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i30와 골프가 그렇게나 수준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닌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뜻일까요? 폭스바겐은 우리나라 해치백 시장의 마중물이 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는 하나도 없는 컨버터블이 수입차에 의하여 명맥이 유지되듯이 수입차는 그 시장 규모보다 자동차 시장의 다양성을 지키고 성장시키는 데에는 훨씬 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독일의 프리미엄 3사보다 대중적인 폭스바겐이 컨버터블보다 대중적인 해치백이라는 장르로 숫자로도 의미가 있는 새로운 시장을 우리나라에 만들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골프라는 마중물이 끊기자 아직 자기 자리를 잡지 못했던 i30의 생명도 끝이 난 겁니다.
4천만원 전후의 티구안은 수입차를 처음으로 접하는 고객이 아주 많았던 모델입니다. 차의 크기를 조금만 희생하면 수입차를 탈 수 있었고 게다가 SUV는 실제로는 실용적이지만 이미지는 여가를 즐기는 사람으로 보여질 수도 있는 안성맞춤의 변장복(?)이니까요. 수입 SUV를 탄다면 – 그것도 큰 지출의 증가 없이 – 아주 솔깃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싼타페 풀옵션과 경쟁한 티구안은 국산차와 수입차가 대중적 시장에서 본격적인 경쟁을 시작한 첫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 브랜드들은 훌륭한 기본기에도 불구하고 수입차로 소위 ‘올라간다’는 심리적 충족감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혼다 CR-V나 토요타 RAV4는 그만큼의 심리적 파괴력이 부족했습니다. 티구안이 사라지자 수입차와 국산차의 경쟁점은 다시 제네시스 급의 고급차로만 집중되었습니다.
이렇듯 폭스바겐은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에 다양성을 키우고 국산차와 수입차의 벽을 허물던 브랜드였습니다. 럭셔리 브랜드들이 차지하던 수입차 시장 베스트셀러 브랜드에 대중 브랜드가 들어섰던 것은 20세기에 기아차가 수입했던 머큐리(포드), 금융위기 이전의 혼다, 그리고 폭스바겐 뿐입니다. 그리고 폭스바겐은 전방위적으로 시장의 모양과 분위기에 큰 영향을 끼쳤었다는 점에서 다른 두 브랜드들보다 의미가 컸습니다.
다시 몇 년 전의 모양으로 퇴행한 우리나라 자동차 시장에 다양성과 무한 경쟁을 가져올 브랜드가 필요합니다. 수입차, 국산차 시장을 가리지 않고 들쑤시고 다니며 낯설지만 의미가 있는 새로운 장르를 퍼뜨릴 브랜드 말입니다. 다시 인증을 신청한 폭스바겐이 제자리를 다시 찾을까요? 아니면 모델 3로 전기차의 대중화를 노리는 테슬라일까요? 수입차 클리오로 재미있는 차를 선보이려는 국산차 브랜드 르노삼성일까요? 아니면 전기차를 대거 투입할 현기차일까요?
누구든 상관없습니다. 누구든 잠잠한 시장에 가물치처럼 평지풍파를 일으킬 역동성만 제공하면 됩니다. 그래야지 소비자들이 혜택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 맞습니다. 최종 승자는 항상 소비자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시장 경제의 본 뜻이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나윤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