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그 누구도 그랜저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걸까
2018-06-17 이동희
[이동희의 자동차 상품기획 비평] 2018년이 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여름이 눈앞이다. 외교와 정치적으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지나가고 있다.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몇 년이 흐른 것 같다는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느낄 것이다. 자동차시장에서도 큰일들이 지나갔다. 한국GM 사태부터 부산모터쇼까지 큰 이슈들은 물론 다양한 신차들이 시장에 쏟아졌다.
너무 중요한 일들이 많이 생기다 보니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지난해 우리나라 자동차 판매 1위는 현대자동차 그랜저였다. 승용차와 SUV, 미니밴과 1톤 이하의 상용차를 포함해 국산차만 150만 대가 넘게 팔리는 와중에 그랜저는 가솔린과 하이브리드를 합쳐 13만 대 가까이 팔리며 전체 시장 점유율에서 8.6%, 경차를 포함해 75만8천여 대가 팔린 승용차 부분에서는 무려 17%를 차지했다. 국내에 팔리는 승용차가 전기차 등을 포함해 33종이나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영향력이 어땠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올해 5월까지의 판매는 어땠을까? 그랜저는 5월말까지 거의 5만 대 가까이 팔렸고, 같은 조건의 국산차 판매량이 61만 대를 살짝 넘긴 수준으로 전체 시장 대비 점유율은 8.1%로 살짝 내려갔다. 하지만 승용차 시장 안에서는 지난해 말과 동일한 17%를 차지해 인기가 여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 싼타페 등 새차가 나오면서 SUV 시장이 전체적으로 성장한 것인데, 상용차를 제외한 점유율에서도 지난해 말 승용차/SUV가 59.4/34.1%였던 것과 비교해 5월 말에는 57.1/36.1%로 바뀌었다. 결국 전체적으로 승용차에서 SUV로 넘어가는 중이지만 아직까지 중대형 세단 시장에서 그랜저의 위치는 굳건하다고 할 수 있다.
동급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차들의 제원과 가격은 어떨까? 차체 크기를 기준으로 할 때 길이는 5m를 기준으로 앞뒤 10cm 정도이고 휠베이스는 2830mm 이상인 경우가 많다. 가격으로 보면 기본형 모델이라도 3천만 원을 넘기는 것으로 시작하고 같은 급 국산차에선 임팔라 3.6L 가솔린 모델의 미드나이트 블랙 에디션이 최대 4천619만 원으로 가장 비싸다. 한 등급 아래인 중형 세단이 길이에서는 4800mm 대이지만 휠베이스는 2800mm 부근이고 2천만 원대 초반에서 시작하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이런 기준은 수입차도 마찬가지인데, 정확하게 말하자면 해외를 기준으로 할 때 중형차로 구분되는 토요타 캠리나 혼다 어코드, 닛산 알티마 등이 가격대에서 국산차와 경쟁한다. 디젤 게이트 이후 다시 판매를 시작한 폭스바겐 파사트 GT도 4천300만 원부터 시작하는 가격으로 종종 경쟁 차종으로 언급되지만, 4765mm의 길이와 2786mm의 휠베이스를 생각하면 사실상 국내 중형차 규격보다 한 사이즈 작아 직접적인 경쟁 모델은 아니다.
우선 국산차부터 꼼꼼히 둘러보자. 현대 그랜저와 사실상 형제차인 기아 K7과 쉐보레 임팔라가 있다. 르노삼성 SM6의 경우 이 급에서 반드시 있어야 하는 6기통 엔진이 없다. 차의 크기나 장비를 따지기 전에 아직까지 세단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파워트레인에 대한 선택에서부터 밀리는 셈이다. 그랜저가 지난해 전체 1위 및 올해에도 월 평균 1만 대 정도가 등록되며 가장 많이 팔리는 자리를 지키는 동안 2위인 K7은 월 평균 3,110대로 1/3 정도에 머물렀다. 지난해에는 연간 판매가 46,577대로 평균 3,880대가 팔린 것에 비하면 판매량이 줄었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까지 제대로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은 쉐보레 임팔라는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의 숫자다. 지난해 내내 3,603대가 팔렸는데, 올 해 5월까지 판매 합계가 714대다.
개별 상품의 가격표를 훑어보면 그랜저의 단독 질주 이유를 쉽게 알 수 있다. 4기통 2.4L부터 V6 3.0L와 3.3L의 세 가지 가솔린 엔진, 역시 4기통 2.2L 디젤 엔진과 V6 3.0L 직분사 LPG 엔진, 하이브리드까지 모두 여섯 가지의 파워트레인을 선택할 수 있다. 2.4L 가솔린과 디젤에는 모던/프리미엄/프리미엄 스페셜의 3가지 트림을, 하이브리드는 이보다 기본 모델이 프리미엄부터 시작해 익스클루시브/익스클루시브 스페셜까지 3가지 트림이다. 3.0L 가솔린은 2가지와 가장 상위 엔진인 3.3L는 딱 한가지만으로 구성되어 전체 모델 수는 12개가 된다. 장애인용도 두 가지 트림을, 렌터카도 3가지 트림을 넣어 선택의 폭이 엄청나게 넓다. 렌터카/장애인용을 제외하면 2.4L 기본형이 3천105만 원부터 시작하고 최상위 모델인 3.3L 셀러브리티가 파노라마 선루프(110만 원)와 헤드업 디스플레이(100만 원)만 선택사양까지 포함하면 4,540만 원이 된다.
반면 임팔라는 가솔린 엔진만 있으며 4기통 2.5L에 LT와 프리미어 두 개 트림, V6 3.5L에 프리미어 한 가지만 있다. 미드나이트 블랙 에디션까지 합쳐도 모두 5개 트림이다. 기본형의 값이 3천597만 원으로 그랜저나 K7보다 높은데, 전방 추돌 경고나 사각지대 경고 같은 능동형 안전 사양이 기본이고 10개의 에어백과 R-MDPS 등 기본 장비가 충실해서 사실상 가격 차이는 없다고 봐도 무관하다. 하지만 경쟁 모델이 V6 엔진이나 디젤 엔진을 고르면 8단 자동변속기가 달리는 것에 비해 임팔라는 모두 6단 자동이고 옵션이기는 하지만 기본형 중간급 트림부터 LED 헤드라이트를 선택할 수 있게 구성된 그랜저나 K7과 비교할 때 상위 모델인 프리미어로 가도 HID 램프 밖에 달리지 않는 등 장비면에서 많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차체 길이가 5110mm로 동급에서 가장 길고 넓은 트렁크는 장점이다.
그랜저의 형제차인 K7도 파워트레인은 동일하다. 다만 판매 가격표 리스트에서 디젤 모델을 가솔린 2.4L와 동일한 트림으로 운영하면서 300만 원을 더한 패키지 형태로 표기하는 것이 특이하다. 또 다른 차이는 V6 3.3L 엔진을 얹은 차인데, 그랜저가 4천330만 원인 셀러브리티 트림 하나만 판매하는 것에 비해 K7은 3천725만 원의 리미티드 플러스와 3천990만 원의 노블레스 두 가지 트림으로 나뉜다. 최상위 모델인 노블레스에 파노라마 선루프(110만 원)와 퀼팅 나파 가죽 등이 포함 프리미엄 패키지(105만 원), 크렐 프리미엄 사운드(115만 원), 드라이브 와이즈II(150만 원)를 더하면 4천470만 원이 되어 그랜저보다 70만 원이 낮다. 풀옵션 상태의 최상위 모델을 기준으로 할 때, K7에는 퀼팅 디자인의 시트와 운전석 전동 익스텐션, 4웨이 럼버 서포트 등이 더해진다. 낮은 값에 장비는 더 많은 셈이 된다. 차체 크기도 K7이 길이 40mm, 휠베이스 10mm가 더 길다. 디자인은 개인 취향의 영역임은 분명하지만 전체적으로 직선을 많이 사용한 K7이 더 크고 당당하게 보인다.
각 모델의 장단점을 요약하면 판매 결과에 대한 이유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인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트림을 기본으로 갖추는 것은 물론 선택 사양이 많아 소비자들의 요구를 꼼꼼하게 채워줄 수 있는 그랜저와 K7이 잘 팔릴 수밖에 없다. 다만 중대형 세단 고객들이 더 선호할 수 있는 보수적인 디자인에 작은 폭이긴 하지만 값이 싼 K7이 그랜저보다 1/3 수준도 팔리지 않는 것은 다른 이유다. 바로 제품 이름에서 주는 브랜드다. 비록 지금은 제네시스 브랜드가 생기며 현대자동차 그룹 전체에서 플래그십 위치를 내주었지만, 현대자동차 브랜드만 생각할 때 가장 크고 비싼 차인 것은 분명하다. 1986년에 처음 나와 벌써 32년이 된 이름이 사람들에게 새겨진 것이 가장 큰 힘이다. 더욱이나 과거보다 젊어진 디자인으로 더 넓은 고객층을 포용할 수 있게 된 것도 판매 1위에 오른 이유이기도 하다.
쉐보레 임팔라는 기본적으로 재고 관리와 판매 예측의 어려움 때문에 트림과 옵션을 다양하게 구성할 수 없는 수입차라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그 동안 한국GM이 크루즈나 트랙스에서 보여줬던, ‘자동차의 기본기가 좋은 점’을 지나치게 가격에 반영해 경쟁 모델보다 높은 값으로 내놓았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는 점이 결정적인 원인이다. 그랜저에 대한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는 차가 되기에도 부족했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는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의 부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K7은 어떨까? 그랜저만큼의 헤리티지나 브랜드 파워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크다. 기아 브랜드가 디자인에 강점을 내세워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던 시기에도 K7은 포지션이 애매했다. 결국은 기아자동차라는 소속 회사를 비롯해 각각의 개별 모델의 포지셔닝을 명확히 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특히나 그랜저와 파워트레인과 대부분의 옵션이 똑같다는 점도 선택의 상황에서 ‘기왕이면 그랜저를’이라는 사람들의 선택에 이유를 주지 못했다. 이는 영업현장으로도 이어져 고객을 설득할 분명한 이유나 강조할 세일즈 포인트가 불분명해지는 원인이 된다. 이번 2019년식 기아 스팅어가 옵션에 변화를 주어 같은 플랫폼인 제네시스 G70과 확실한 차별화에 나선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중대형 세단은 보수적이면서도 첨단 기능과 젊은 분위기를 추구하는, 말 그대로 복잡하고 이율배반적인 시장이다. 다음 칼럼에서는 같은 시장을 공략하는 수입차를 중심으로 경쟁력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진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이동희
이동희 칼럼니스트 : <자동차생활>에서 자동차 전문 기자로 시작해 크라이슬러 코리아와 재규어 랜드로버 코리아 등에서 영업 교육, 상품 기획 및 영업 기획 등을 맡았다. 수입차 딜러에서 영업 지점장을 맡는 등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