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km/L 괴물 연비’ 3로터 엔진차를 밀어붙인 마쓰다의 패착
2018-11-12 변성용
로터리 엔진의 시작과 끝 (5)
(4부에서 이어집니다)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RX-7. 마쓰다는 여러 차에 로터리 엔진을 사용했지만, 오늘날의 로터리엔진이라는 존재를 각인시킨 차는 단 한 대로 귀결된다. 전세계에 ‘로터리=스포츠’의 이미지를 심는데 성공했으며, 수많은 로터리 엔진 팬을 만들어낸 아이콘은 세 번의 모델체인지를 거치며 80만대가 넘게 만들어질 정도로 상업적인 성공도 거뒀다. 하지만 마쓰다는 이걸로 만족할 수 없었다. 로터리 엔진만으로 만들어진 풀 라인업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갖 고난을 넘어 로터리 엔진을 붙잡고 달린 여정의 다음 차례는 대형 고급차였다. 로터리 기반의 대형 세단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엔진은 RX-7의 변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상용화 이래 벗어나 보지 못한 2로터만 가지고 고급차 시장에 도전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의 고생을 생각하면 로터의 숫자를 늘리는 것은 난이도가 낮은 쪽에 속했다. 피스톤 엔진의 기통수를 늘이는 것과 비교하면, 로터리 엔진의 로터수를 증가시키는 것은 기구적으로 훨씬 간단하다. 그냥 로터 하우징을 이어 붙이면 되니까. 왕복운전을 회전운동으로 바꿔야 하는 피스톤 엔진의 크랭크 샤프트는 기통수가 늘어날수록 가공 난이도가 올라간다. 이에 비해 회전운동만 하는 로터리 엔진의 동력축인 편심샤프트는 생김새가 짧고 단순해 가공도 쉽다. 3로터 엔진이 양산되지 못한 것은 기술이 아닌 수요의 문제였다. 마쓰다는 어디까지나 대중차 제조업체였으며, 당시의 브랜드 파워로 6기통 이상의 고급차 시장에 달려드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마쓰다가 가만히 있을 회사도 아니었다. 그들이 3로터 엔진을 들고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레이싱’이었다. 상용엔진과는 달리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한 레이스용 로터리 엔진은 4로터까지 확장된 끝에 마침내 세계의 정점을 찍는다. 마쓰다가 르망의 문을 두드린 지 10여년만인 1991년, 로터리 엔진을 장착한 마쓰다의 그룹C 레이스 머신, 787B가 르망 24시에서 우승한 것이다. 로터리 엔진을 붙잡고 씨름한지 30년, 이제 초로에 접어든 개발자들에게 이 이상의 값진 선물은 없었을 것이다.
로터리엔진이 가장 빛나던 이 시기의 한편에서는 마쓰다 최초의 3로터 양산차가 시판된다.
◆ 처음이자 마지막 3로터 로터리
버블경제로 인해 고급차에 대한 수요가 크게 뛰어오르자, 마쓰다는 용감하게 브랜드 확대 정책을 펼친다. 산하에 거느린 내수 채널만 4개(고급차 유노스, 스포츠카 앙피니, 경차 오토잠, 제휴사 포드차량 판매용 오토라마). 그 중 고급차 브랜드였던 유노스의 플래그십으로, 3로터 엔진의 투입이 결정된다. 고급차로 타깃이 정해졌지만, 첫 모델이 정중한 4도어 세단이 될 필요는 없었다. 고급 쿠페가 아주 잘 팔리고 있던 시절 비싸도 괜찮은 GT스타일의 대형 2도어 쿠페로 먼저 3로터의 성능과 가치를 인정받자는 제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된다. 차의 이름은 코스모. 초대 로터리 엔진차이자 전통의 GT카의 법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1990년 4월, 양산차 최초로 3로터 로터리 엔진을 탑재한 호화 쿠페가 등장한다.
유노스 코스모는 마쓰다가 가진 모든 기술을 쏟아 부은 차였다. 4.8m가 넘는 길이의 늘씬한 2도어 쿠페는 오직 코스모 전용으로 만들어진 후륜구동 플랫폼 위에 만들어졌다. 엔진은 두 가지로, 3로터 사양 20B-REW와 함께 기존 2로터 사양인 13B-REW엔진도 함께 준비되었다. 654cc 로터 3개를 이어 붙여 배기량이 1962cc (피스톤 엔진 환산 시 4리터급)로 확대된 엔진은 피스톤 엔진으로는 12기통에 필적하는 부드러움을 자랑했다. 333마력에 41kg.m의 토크를 내도록 설계되어 있었지만, 당시의 행정지도에 따라 국내 자율 규제 범위 내에 들어가도록 출력이 280마력으로 재조정됐다.
탑재된 트윈 터보는 RX-7(FD3S)과는 달랐다. 크고 작은 터빈을 달고 배기가스의 양에 따라 순차적으로 작동시켜 터보랙을 줄이도록 한 시퀜셜 트윈 터보방식을 채택해 초반부 토크감이 엷은 단점을 보완했다. 머플러는 고회전에서 경로를 바꾸는 가변 배기 기능을 채용했다. 4개의 머플러가 회전하여 개방된 포트 수를 바꿨다. 40kg.m가 넘는 큰 토크를 감당할 수 있는 수동 변속기가 없었던 탓에 당시의 스포츠 모델로서는 이례적으로 4단 자동 변속기만이 준비되었다.
신기능은 단지 기계적인 부분에 머무르지 않았다. 버블의 시대에 출현한 럭셔리 쿠페는 당대에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걸 가져다 발랐다. 내장재는 모두 이탈리아에서 가죽과 우드패널을 공수해다 썼다.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로 점철된 장비 또한 필수. 코스모는 차량용 GPS 내비게이션을 탑재한 세계 최초의 차였으며, 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도입한 첫 번째 사례이기도 했다. 1990년대 시판차임에도 불구하고 이 차의 센터콘솔에선 버튼을 찾아보기 힘들다. 조작계를 모두 터치스크린 속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걸 개발하던 시기는 1980년대, 아직 LCD 같은 게 상용화되기 전에 뭘 썼겠는가? 이들이 사용한 것은 CRT(그러니까, 브라운관!) 기반의 감압식 터치 스크린이었다. 액정을 이용해 태양광의 투과율을 조절하는 선루프라는, 요즘도 보기 힘든 기능도 만들었다. 내구성 문제와 판매량 부족이 겹쳐 취소되었지만, 미련을 못 버린 채 나중에라도 추가로 달 수 있게 모든 생산차에 회로를 내장시켜 놓았다. 과연 버블의 시대였다.
◆ 버블과 함께 꺼지다
이 모든 기술과 장비 덕분에 유노스 코스모는 엄청나게 비쌌다. 20B에 풀옵션을 장착한 차의 가격은 575만엔(현재 물가와 환율로 환산 시 약 1억4천만원). 발매 후 거의 30년이 다 되가는 지금까지도 500만엔이 넘는 마쓰다 차는 이게 유일하다. 이 당시가 얼마나 미쳐 돌아갔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지만, 그 때는 이런 짓을 하는 회사가 마쓰다만 있던 것에도 아니었으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유노스 코스모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연비’였다. 출력과 토크라는 마케팅 지표에서 경쟁차를 압도하고 싶었던 마쓰다는 연비가 다소 떨어지더라도 강력한 성능을 우선순위에 놓을 것을 개발진에 요구했다. 그래서 3로터에 트윈 터보까지 추가된 엔진은, 출력을 확보한 대신 말 그대로 기름을 ‘들이켜면서’ 달렸다. 6.1km/L 밖에 안 되는 공인연비는 얌전히 정속주행 할 때나 가능한 수치로, 실 측정 시 바로 절반 수준인 3km/l로 떨어졌으며 정체 속 시내 주행이라는 최악의 경우 1km/L 언저리까지 추락했다. 출력만 나와 준다면 기름값 정도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던 거품 경제의 시대조차 이 말도 안 되는 ‘괴물 연비’를 감당하지 못했다.
자신들의 이상과도 같았던 3로터 엔진차를 최고로 치장해 선보이고 싶었던 마쓰다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그들의 패착은 자신들의 고객을 너무 과대평가했다는 것이다. 거품경제가 붕괴하면서 판매량은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해 버리지만, 마쓰다는 이 차를 무려 6년 동안 끌고 간다. 그들이 3로터의 자존심을 버린 것은 포드에 합병당하고 난 뒤의 일이다.
6년간 모두 8875대의 유노스 코스모가 판매됐다. 그나마 판매량의 6할은 2로터 모델이었으며 3로터 사양의 코스모 판매는 통틀어 3500대도 안 됐다. ‘폭망’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 숫자였다
(6부에 계속 됩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