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일등공신, 조르제토 주지아로
2018-11-23 임범석
“많은 자동차디자이너들이 그들만의 히어로, 그러니까 영웅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내 영웅, 내 멘토들은 나의 디자인 상상력에 커다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임범석의 디자인 에세이] 창작이 수반되는 분야에서, 스타플레이어, 그러니까 영웅은 늘 존재한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함께 때로는 아이돌 대접까지 받기도 한다. 자동차디자인 분야도 비슷하다. ‘최고의 자동차디자이너’라는 명성과 함께 스타플레이어가 된 디자이너가 적지 않다.
자동차회사가 특별히 한 사람의 자동차디자이너를 지목해 그를 띄우는 경우는 드물다. 자동차는 수만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지는데,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들어가야 나올 수 있다. 자동차를 위한 디자인 역시 한 사람만이 아닌, 여러 디자이너들의 손길이 필요하다. 특별히 누구 한 사람을 콕 짚어 내세우기 애매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10~15년 사이, 자동차업계 분위기가 확 바뀌면서 신차발표회장에서 대표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이제는 자동차성능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디자인도 자동차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기 때문.
전 BMW 디자인 부문 부사장 ‘크리스 뱅글’은 지난 수십 년 사이 사람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린 스타 디자이너다. 1992~2009년 BMW에 있으면서 모든 BMW 모델에 일대 혁신을 일으킨 인물이다. 단지 BMW만이 아니라 다른 브랜드 디자인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크리스 뱅글이라는 이름이 알려지면서, 또 다른 자동차디자이너들도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패션디자이너처럼, 자동차디자이너도 스타 열풍이 일어난 것. 메르세데스-벤츠 고든 바그너, 기아자동차 피터 슈라이어, 재규어 이안 칼럼, 닛산 시로 나카무라, 피닌파리나 켄 오쿠야마, 그리고 현대자동차의 루크 동커볼케 및 이상엽 등이 그들이다. 자동차디자인 세계의 스타플레이어로, 자동차디자인에 혁신을 넣었을 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디자이너들을 키워내고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이들은 다른 디자이너들의 영웅, 혹은 멘토이기도 하다. 나 역시 자동차디자이너로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그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렸고,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디자인 테크닉은 교과서로 배우는 게 아니다. 교과서를 통째로 달달 외웠다고 디자인 실력이 느는 게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자동차디자인이 무엇인지 설명해주는 교과서도 없다. ACCD에서 15년 간 후배들을 가르치면서도 교과서를 펼쳐 놓고 설명한 적은 없다. 물론, 나 역시 학생시절 그렇게 배우지도 않았다.
자동차디자인은, 선생들과 학생들 간의 끊임없는 몸짓과 손짓을 통해 가르치고 배우는 반복의 과정이다. 함께 디자인하고, 또 그것을 보고 이야기하고, 평가하며, 다시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대화하고 그리고, 평가하고 평가받고, 다시 디자인하고, 논의하고. 연습과의 싸움이며 시간과의 투쟁이다.
그리고 많은 자동차디자이너들이 그들만의 히어로, 그러니까 영웅을 가지고 있다. 나 또한 누군가를 마음에 품고 있었으며, 그들과의 만남을 고대했다. 내 영웅, 내 멘토들은 나의 디자인 상상력에 커다란 영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의 작품을 봄으로써 새로운 디자인세계를 접할 수 있으며, 꿈과 이상을 위해 도전이라는 과제를 내주기도 한다. 그들의 작품을 통해 많은 걸 배우고 익힌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자동차디자인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자동차디자이너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실제로는 보지 못한) 망고나 두리안처럼 열대과일 같은 이국적인 단어였다. 어린 시절, 자동차디자인이나 디자이너 관련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이런 분야가 있다는 것을 겨우 알게 됐다. 그것도 구글 검색이 아닌 자동차잡지를 통해서다. 잡지를 본 이후 자동차디자이너가 꿈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꿈과 함께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자동차디자인 세계에 발을 디디려 한다. 자동차, 자동차디자인, 자동차디자인 학교, 그리고 자동차디자이너.
오, 잠깐. 생각해보니 포니 시대에 자동차디자이너에 대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1975년 현대자동차가 포니를 발표하면서 마케팅 일환으로 포니 디자인을 살짝 내세웠다. 당시 ‘이탈리아 디자인’은 마케팅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꽤나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조르제토 주지아로.’
이탈리아의 유명한 자동차디자이너다. 당시, 포니와 함께 그의 이름이 신문 어느 면에 나왔을 수도 있겠지만, 10살짜리 꼬마가 신문을 볼 리는 없고, 당연히 그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그저 한국에서도 정말 좋은 차가 나왔고, 타고 싶고, 갖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이다. 거의 모든 한국 사람들에게 조르제토 주지아로라는 이름은 와 닿지 않았을 터이고, 신문에서 잠깐 읽었다고 해도 그저 많은 외국인 중 한 사람이었을 게다.
나 역시 그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그의 작품은 보았지만, 그의 이력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멋진 차에 열광했을 뿐이지, 그 멋진 차를 누가 디자인했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주지아로는 내가 자동차디자인 세계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머릿속에 깊숙이 박힌 디자이너다. ACCD 입학 이후 전세계에서 모인 많은 친구들은 누가 어떤 자동차를 디자인했는지 항상 이야기했고,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이 주지아로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가 그린 라인, 디테일, 모양 등 어린 시절, 나는 그의 작품들을 여럿 보았다. 포니, 포니2, 엑셀, 스텔라 등 현대자동차에서 나온 차들이 그의 작품이었다. 주지아로는 자동차세계의 신생아 현대자동차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낸 일등공신이었다. 나는, 자동차와 이를 디자인한 디자이너 이름을 서로 연결하지 못했던 것. 그저 차만 봐왔던 것이다.
이후 오리지널 골프를 처음 본 순간, 주지아로가 디자인한 모델임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었다. 이미 여러 모델에서 주지아로만이 그리는 섬세한 라인과 디테일들을 봐왔기 때문. 그는, 알파로메오, 피아트, 로터스, 그리고 마세라티 등 수많은 브랜드에서 다양한 작품을 쏟아냈다. 드로리안 DMC-12, 로터스 에스프리, 마세라티 기블리 및 BMW M1 역시 그의 작품이다.
올해 80세인 주지아로는 6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전세계 자동차디자인을 이끈, 자동차디자인 분야의 천재다. 17세에 피아트에서 일을 시작했고, 몇 년 뒤 토리노모터쇼에서 이탈리아 자동차디자인의 거장 누치오 베르토네를 만난다. 즉석에서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내밀며 평을 부탁했고, 베르토네 디자인으로 스카우트된다. 베르토네가 직접 주지아로를 테스트했으며, 나중에 주지아로 디자인을 알파로메오에 판매하기도 했는데…. 그리고 마침내 나의 영웅과 만나게 된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임범석 (전 미국 ACCD 디자인학과 교수)
임범석 칼럼니스트 : 미국 ACCD를 졸업하고 GM 및 혼다에서 디자이너 생활을 했다. 이후 한국인 최초로 ACCD 교수를 역임하며 미래 자동차업계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했다. 최근 중국으로 활동무대를 넓혀 글로벌 디자인 컨설턴트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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