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차례 쓴맛 본 제네시스, 이번에는 유럽 진출 성공할까

[이완의 독한(獨韓) 이야기] 현대차그룹 제네시스의 유럽 진출이 가시화되고 있다. 그룹을 이끄는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내년 유럽과 중국 시장에 공식 진출하는 제네시스를 놓고 현지 법인장들과 심도 있게 논의했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10년 가까이 계획하고 준비한 현대차의 럭셔리 브랜드가 과연 철옹성과 같은 유럽 고급차 시장을 뚫고 들어가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쉽지 않은 도전이 될 것이라는 전망부터, 정 부회장의 브랜드에 대한 애정과 각오가 남다른 만큼 일부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안착시킬 것이라는 기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우려의 목소리가 더 큰 편이다.

◆ 한 차례 유럽 시장에서 쓴맛 본 제네시스

현대자동차는 이미 제네시스 G80을 유럽에 내놓고 쓴맛을 본 경험이 있다. 당시 유럽 자동차 전문지는 물론 일간지 기자들을 불러 시승 행사를 가지기도 했지만 분위기는 거기까지였다. 판매량은 의미를 둘 수준이 아니었고, 결국 잠시 유럽 땅에 머물던 G80은 2017년 조용히 철수했다.

하지만 현대자동차 측은 당시 G80 유럽 진출을 상징적인 것으로만 봐달라고 했다. 유럽 시장 공략을 위해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제대로 광고 한 번 하지 않았고, 매장에서 G80을 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랬다. 현대차의 유럽 본진인 독일에서도 G80에 대한 어떤 형태의 광고도 볼 수 없었고, 직접 찾은 유럽 최대 현대차 매장에서도 G80은 보이지 않았다.

디젤 세단 판매량이 높은 유럽에 가솔린 엔진 하나만 들여온 것만 봐도 판매보다는 그들 표현대로 ‘우리도 이런 차를 만든다’라는 상징적 의도로 G80 유럽 진출을 바라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이런 변명도 의미 없게 됐다. 별도의 제네시스 법인을 만들며 제대로 된 유럽 시장 공략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 물러설 수 없는 도전, 그나마 세단보다 SUV가 가능성 높아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곧 공개될 SUV인 GV80과 G80, 그리고 이미 출시된 G70과 또한 새롭게 선보일 SUV GV70 등이 유럽 땅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플래그십 세단 G90도 판매될 가능성은 있으나 큰 기대를 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현대차가 주력으로 내세울 모델은 GV70이 될 가능성이 크다. 왜 그럴까?

우선 유럽의 럭셔리 브랜드 소비 성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럽은 자동차에 있어 보수적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수성은 새로운 브랜드, 새로운 모델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긴 시간 검증된 모델과 브랜드에 대한 선호를 의미한다. 유럽 운전자들은 스타일과 주행성만큼이나 브랜드가 만들어온 역사, 흔히 말하는 헤리티지(전통)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현재 유럽은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등, 흔히 말하는 독일 프리미엄 3사가 고급 차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긴 역사,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쌓아온 전통, 그 전통을 통해 얻어낸 브랜드 가치, 숙성된 엔지니어링을 통한 높은 주행 만족도와 품질 등으로 다른 브랜드가 끼어들 여지를 두지 않고 있다. 특히 이런 특징은 세단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에 비하면 SUV는 세단 소비 패턴과 비교해 비교적 유연한 편이다. 이는 실제 판매량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이 가능하다.

<주요 고급 브랜드 유럽 2018년 판매량> (자료=카세일즈베이스닷컴)

메르세데스-벤츠 : 877,988대
BMW : 817,354대
아우디 : 713,868대
볼보 : 319,048대
재규어 : 84,311대
렉서스 : 46,170대

주요 고급 브랜드 판매량을 보면 독일 3사의 점유율이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 그나마 볼보가 SUV의 선전으로 아우디 44% 수준까지 올라왔을 뿐 나머지는 판매량에서 경쟁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세단과 SUV로 나눠 판매량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주요 고급 중형(D세그먼트) 세단 2018년 유럽 판매량>

아우디 A4 & A5 (S4, S5, RS4, RS5 포함) : 112,484대+49,799대 (합계: 162,283대)
BMW 3시리즈 & 4시리즈 : 106,991대+52,248대 (합계: 159,239대)
메르세데스 C-클래스 : 150,995대
볼보 S60 & V60 : 5,555대+41,390대 (합계: 46,945대)
재규어 XE : 10,877대
렉서스 IS : 5,413대

<고급 준대형 (E세그먼트) 주요 세단 2018년 유럽 판매량>

BMW 5시리즈 & 5시리즈 : 108,658대+10,773대 (합계: 119,431대)
메르세데스 E-클래스 : 117,906대
아우디 A6 & A7 (S6, S7, RS6, RS7 포함) : 71,258대+8,935대 (합계: 80,193대)
볼보 S90/V90 : 56,192대
재규어 XF : 10,375대
렉서스 ES & GS : 3,205대 + 1,066대 (합계 : 4,271대)

유럽에서 고급 세단은 덩치, 그러니까 크기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보다는 주행성능과 안락함, 첨단 기능, 그리고 브랜드에 대한 선호가 (곧 확인할) SUV에 비해 분명하다. 디젤 엔진이 장착된 세단이 여전히 판매량을 일정 수준 유지하고 있고, 무엇보다 왜건의 비율이 매우 높다는 점 등이 특징이다. 따라서 제네시스가 경쟁력 있는 디젤 엔진, 그리고 왜건형 G70과 G80을 내놓지 않는 이상 세단에서 판매량을 끌어 올리는 것은 한계가 있다. 설령 나온다 해도 성공을 자신할 수 없는 영역이다. 반면 SUV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시장이 좀 더 유연하고 보수성도 덜한 편이다.

<주요 고급 중형 SUV 2018년 유럽 판매량> (자료=카세일즈베이스닷컴)

메르세데스 GLC & GLC 쿠페 : 125,143대+30,509대 (합계: 155,652대)
BMW X3 & X4 : 63,481대+17,943대 (합계: 81,424대)
아우디 Q5 : 70,852대
볼보 XC60 : 80,020대
재규어 F-페이스 : 23,520대
렉서스 NX : 20,683대

<주요 고급 준대형 SUV 2018년 유럽 판매량>

BMW X5 & X6 : 30,590대+9,445대 (합계: 40,035대)
아우디 Q7 & Q8 : 23,123대+11,121(Q8 판매량은 2019년 3~10월. 합계: 34,244대)
메르세데스 GLE & GLE 쿠페 : 24,886대 + 6,081대 (합계: 30,976대)
볼보 XC90 : 30,356대
레인지로버 스포츠 : 24,732대
포르쉐 카이엔 : 13,848대
렉서스 RX : 7,193대



고급 SUV 중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중형급인 렉서스 NX의 판매량이다. 유럽에서 렉서스의 특정 모델 연간 판매량이 2만 대를 넘기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모델 자체의 경쟁력이 좋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전통적으로 주행성능을 중요하게 여기는 세단과 달리 SUV의 경우 주행 감성을 크게 요구하지 않는다. 또한 세단과 달리 SUV의 역사가 짧고, 이에 따라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 또한 상대적으로 높다고 보기 어렵다. 여기에 가격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어 그나마 장벽이 낮은 곳이 중형 SUV라 할 수 있다. 바로 제네시스 GV70의 영역인 것이다.

반면 GV80부터는 분위기가 또 달라진다. 독일 3사의 히트 모델들은 물론,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해 바람을 일으킨 볼보 XC90, 전통의 강자 레인지로버 스포츠와 포르쉐 카이엔 등이 버티고 있다. 이 화려한 후보들을 모두 뿌리치고 제네시스 GV80을 선택하게 만들기 위해선 강력한 유인 요소가 필요한데 그 한방을 마련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각에서는 GV80이나 G80이 유럽 시장 공략의 핵심 모델처럼 이야기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단이나 준대형급 SUV 시장은 현실적으로 기존 강자들과 싸우기에 쉽지 않다. 그나마 3시리즈를 철저하게 벤치마킹한 G70, 그리고 비교적 장벽이 낮다고 볼 수 있는 중형 SUV GV70으로 유럽 시장 안착을 노리는 게 현실적이다.



◆ 렉서스가 될 것인가, 인피니티가 될 것인가

해가 바뀌면 제네시스의 유럽 진출도 본격화된다. 과연 어떤 각오와 전략으로 이 어려운 시장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여기서 현대자동차는 렉서스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미국 시장에서만 1년에 30만 대 이상을 파는 일본산 고급 브랜드 렉서스도 유럽에서는 작년에 4만 6천 대 파는 데 그쳤다. 그나마 이것도 20년 넘는 세월 동안 유럽에서 올린 가장 좋은 성과였다.

그리고 렉서스가 이런 실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중형 SUV NX(전체 렉서스 판매량의 45% 차지) 덕이었다. 도저히 열릴 거 같지 않은 시장에서 렉서스는 긴 시간을 버텼고, 그렇게 20년이 지나서야 겨우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렉서스를 보며 제네시스는 시행착오를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처참한 실적만 남기고 유럽 땅을 떠난 인피니티처럼 될 수 있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다.’ 유럽 진출을 노리는 제네시스에 이 표현만큼 적절한 게 있을까 싶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이완

이완 칼럼니스트 : <모터그래프> 등에 칼럼을 쓰고 있으며 ‘이완의 카폐인’이라는 자동차 동영상 콘텐츠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다. 현재 독일에 살고 있으며, 독일의 자동차 문화와 산업계 소식을 공유하는 일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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