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닛산이 말하길. “리프는 EV가 아닙니다.”
[김형준의 숫자 깨먹기] 400km. 지난 수요일, 그러니까 9월 6일에 닛산 리프(Nissan Leaf)가 일본과 미국에서 동시에 공개됐다. 리프는 고속도로 주행이 가능한 양산 전기자동차다. 2000년에 처음 선보였고, 이번에 공개된 모델은 완전 변경한 2세대다. 이 차로 말하자면 지난 7년 동안 전 세계에서 30만대 가량 판매됐다. 양산돼 일반 시판까지 이른 고속 전기차 중 이보다 많이 팔린 차는 아직까지 없다. 그러니까, 가장 성공적인 전기자동차라고 할 수 있다. 아직까지는.
공개행사, 그리고 이때 함께 배포된 보도자료에 따르면 신형 리프가 1회 충전으로 주행 가능한 거리는 400km다. 우아! 그런데 400km라는 수치 옆에 괄호 치고 ‘일본 JC08 모드’라는 설명이 덧붙었다. 에이, 김샜다. 일본 JC08 모드는 일본 내 시판용 자동차를 위한 연비 측정 기준이다. 유럽이나 미국, 그리고 한국에 비하면 측정 기준이 살짝 여유롭고, 그래서 연비 수치도 다른 시장에 비해 후하게 나오는 편이다. 실제 도로주행 효율과 가까운 것은 미국 EPA, 그리고 미국 기준에 가까운 한국 측정방식 쪽이다.

아니나 달라, 신형 리프의 주행가능거리를 기재한 문장 하단에 (아주 작은 크기로) 적힌 미국 EPA(환경보호청)와 유럽 NEDC 기준 주행가능거리는 일본 기준과 차이가 적잖다. 유럽 NECD 기준 380km이고 미국 EPA 기준 150마일이다. 150마일이면 대략 241km. 이거 왠지 속은 기분이다. 물론 그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눈속임의 의도는 품었던 걸로 보인다.

리프는 데뷔 초인 2010년 24kWh 용량 배터리로 주행가능거리 73마일(117km)을 기록했다. 리프가 가장 성공적인 제품이었던 탓에 양산 전기차 분야의 주행가능거리 기준은 110~130km 수준으로 굳어졌다. 물론 EV의 주행거리는 꾸준히 늘어났다. 리프의 경우 모델 수명 막바지인 2016년형에 이르러선 30kWh 용량 배터리로 주행가능거리를 107마일(약 172km)까지 늘렸다.

그런데 그 기준이 지난해 비약적으로 올라갔다. 쉐보레 볼트(Bolt)와 테슬라 모델 3 때문이었다. GM은 지난해 초 볼트를 공개하면서 미국 EPA 기준 240마일(약 386km)에 가까운 주행가능거리를 갖추게 될 거라고 발표했다. 비슷한 시기 테슬라도 보급형 모델 3를 사전 공개하면서 최소 215마일(약 346km)의 주행가능거리 확보가 가능할 거라고 밝혔다. EV 시장의 기준은 단숨에 ‘주행가능거리 400km 남짓’으로 굳어졌다. 비록 일본 JC08 기준이긴 해도 새로운 리프는 신세대 전기자동차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그런데 주행가능거리 400km가 정말 전기차 소비자에게 절실한 구매 기준이긴 할까? 모델 체인지가 임박한 지난 7월, 구형 리프는 미국에서 1,506대가 판매됐다. 그보다 많이 팔린 순수 EV는 쉐보레 볼트 EV뿐이었다. 그리고 미국 EPA 기준 383km를 달리는 신세대 EV와 172km를 달리는 은퇴 직전 EV의 판매대수 차이는 고작 136대였다. 미국 현지에서는 일부 지역에서 실시된 대대적인 할인 판매 프로모션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할인금액은 무려 1만 달러로, 여기에 연방 보조금 7,500달러까지 더해 미국 소비자는 권장소비자가격(MSRP) 3만680달러짜리 전기자동차를 1만3,180달러(약 1,500만원)에 장만한 셈이다.

어쩌면 대부분 전기차에 대한 세간의 인식도 딱 거기까지인지 모른다. 1,500만원 정도면 망설임 없이 구매할 수 있는, 짧은 주행가능거리도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 단거리 이동용 운송수단 말이다. 이는 비단 미국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현대 아이오닉은 올해 EV 제품(아이오닉 일렉트릭)이 하이브리드 모델보다 더 많이 팔렸다. 기현상이 아니다. 세제 혜택과 보조금 혜택까지 반영한 아이오닉 HEV의 구매가격은 2097만~2490만원, 아이오닉 일렉트릭은 1900만원~2400만원대(서울시 기준)다. ‘만만한’ 가격 앞에 주행가능거리가 고작 191km라는 사실은 아무 장애도 되지 못한다.
이쯤 되면 슬슬 머리가 복잡해진다. 사람들은 전기자동차가 새로운 문물이라 좋아서 사는 걸까, 싸니까 사는 걸까? 전기차 구매 보조금 예산은 해를 거듭할수록 줄어들 텐데 보조금 지급이 중단되면 과연 전기차를 제돈 주고 살 사람이 있을까? 제조사들은 보조금 지급이 멈추기 전까지 정말 전기차 가격을 현실적인 수준까지 낮출 수 있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마땅한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데, 그럼에도 하나 분명한 건 있다. 제 아무리 비싸더라도 팔릴 만한 제품은 팔린다는 거다. 땡빚을 내서라도 지르지 않으면 못 배기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제품 말이다. 떠오르는 전기차가 하나 있다. 테슬라 모델 3다. 실제로 고급차이든 아니든, 주행성능이 환상적이거나 그렇지 않거나, 인테리어가 쿨한지 병맛인지 상관없이 테슬라는 사람들로 하여금 ‘테슬라의 일원’이 되고 싶게끔 만드는 매력이 있다. 스스로의 성공을 내보이고 싶은 사람이 벤츠 엠블럼을 탐하고, 희소성과 성능을 모두 갖춘 궁극의 럭셔리를 실현하고픈 사람이 페라리를 꿈꾸는 것처럼.

하지만 닛산은 럭셔리 브랜드가 아니다. 오리지널 리프 역시 유별나기보단 기존 자동차와 흡사한 감각으로 도로에 자연스럽게 스민 전기차다. 그런 점에서 닛산이 새로운 리프를 다루는 방식은 자못 흥미롭다. 지난 수요일 공개행사에서 차를 소개하기 위해 무대에 오른 닛산 임원들은 구형보다 나아진 주행가능거리를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그보다는 준 자율주행 기능이나 주차지원 장치, 가속과 제동을 아우르는 e-페달 시스템 등을 알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선언하듯 이렇게 말했다. “뉴 닛산 리프는 EV가 아닙니다. 사람들을 더 나은 세상으로 안내하는 닛산 인텔리전트 모빌리티의 아이콘입니다.” 여느 EV와는 질적으로 다른, 첨단 기술을 갖춘 보통의 자동차라는 의미렷다. 그래, 그거야말로 리프답다.

다만 그 뒤로 이어진 언급은 안 하느니만 못했다. “신형 리프는 테슬라가 가지지 못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월드 베스트 셀링 EV라는 업적, 그리고 84년의 디자인과 엔지니어링과 차 제작 역사입니다.” 아아, 결국 그거였어? 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얘기. 신형 리프가 월드 베스트 셀링 EV라는 타이틀을 계속 지켜나가려면 먼저 테슬라 콤플렉스부터 떨쳐내야 할 거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김형준 (모터트렌드 편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