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형과 비슷한 신형, 집념과 고집의 역사
포르쉐 911 vs 지프 랭글러

[강병휘 레이서의 자동차 장바구니] 온라인 쇼핑몰에 들어가 보면 관심이 높고 구입을 고려 중이지만 당장 결제까지 이어지지 않는 아이템을 담아두는 장바구니 기능이 있다. 나에게는 자동차 장바구니가 있다. 첨단 기술로 무장한 최신 신차들도 있지만 부담 없는 가격대로 감가가 된 과거 명차들의 리스트가 더 많다. 사실 세상에는 타봐야 할 차가 많다. 개인적인 목표는 그런 장바구니 속 자동차를 최대한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이루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단일 모델로 가장 많이 팔리는 차종은 현대 그랜저다. 그랜저의 가격은 옵션 및 트림에 따라 3천만원대 초반에서 시작해 4천만원 남짓까지 자리한다. 승용차 시장 베스트셀러가 아슬란 다음으로 비싼 그랜저라는 점도 흥미롭지만, 이 정도 예산이면 내 자동차 장바구니 안에 있는 꽤 많은 모델을 살 수 있는 금액이다. 자동차를 고를 때 기준은 문화가 무르익을수록 남의 시선보다는 자기만족인 경우가 많다. 보다 다채로운 카라이프를 과감하게(?) 도전해 볼 수 있도록 다시 타고 싶은 장바구니 속 자동차 이야기를 주제별로 소개하고자 한다.



첫 번째 주제는 세월을 초월해 큰 변화 없이 고집을 이어오고 있는 모델에 대한 이야기다. 스포츠카의 대표 아이콘인 포르쉐 911 그리고 정통 오프로더의 혈통을 유지하는 지프 랭글러다. 둘은 전혀 장르가 다르지만 수십년간 혈통 보전에 대한 집념과 고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양대산맥이다. ‘차알못’이라면 이전 세대의 911이나 랭글러를 봐도 현행 모델과 차이점을 단번에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1세대 모델부터 현행 모델까지 익스테리어 디자인이나 기본적인 동력계 형태에 큰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변천해 왔기 때문이다.

1963년 이래 911은 언제나 납작 웅크린 개구리 모양에 엔진을 엉덩이 밑에 숨겼고, 네 바퀴의 펜더가 불룩 튀어나온 랭글러는 수직에 가까운 윈드스크린과 탈착식 도어, 기계식 사륜구동계를 고집스럽게 지켜왔다. 덕분에 이 둘은 이전 세대를 중고 모델로 구입한다 해도 왠지 덜 손해보는 느낌마저 있다. 또한 각 세대마다 출시되었던 모델들은 당대 최고의 아이콘으로 군림하기도 했다.



3천만원대 예산으로 911을 살 수 있을까? 코드명 996 모델이라면 가능하다. 911 중고 가격은 연식이 오래될수록 가격이 떨어지다가 다시 올라가는데 변곡점이 형성되는 곳에 바로 996이 있다. 더 오래된 모델인 993은 오랫동안 911의 개성이었던 공랭식 엔진을 탑재한 마지막 모델로서 지금은 몸값이 제법 뛰어오른 상태다. 996의 수냉식 MPI 6기통 엔진을 소개하면서 골수분자들의 비판을 감내해야 했지만 새로운 엔진과 섀시의 완성도는 과부 제조기라 불리던 993과는 또렷하게 선을 그었다.

후속작인 997에게도 기본 뼈대를 제공할 정도로 플랫폼의 잠재력은 뛰어났고, 실내 플라스틱 소재의 완성도나 내구성은 초기 997보다 되려 996이 더 나았다. 카레라의 자연흡기 엔진은 오일 순환계의 고질적 문제로 인해 실린더 내벽의 스크래치 발생 확률이 높은 편이나, GT3나 911 터보에 탑재된 메츠거 계열의 엔진은 내부 구조가 달라 해당 이슈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국내 중고 거래량이 많지 않지만 996 터보 모델은 3천만원 이하로 거래되고 있다. 4.2초의 0-100km/h 실력과 상시 사륜구동으로 전달되는 420마력의 최고출력은 10 여년이 지난 지금 기준으로도 여전히 위력적이다. 번개 같은 PDK 변속기와 비교하면 5단 팁트로닉 토크컨버터의 반응은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이 가격에 트윈터보 수평대향 엔진 사운드를 감상하며 310km/h짜리 자동차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하지 않을까?



지프 랭글러는 군용으로 탄생한 윌리스 MB까지 고려하면 76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전쟁을 위한 싸움꾼으로 탄생한 자동차이지만, 어느 세대의 랭글러를 선택하더라도 낭만과 자유가 스며들어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얼마 전 차세대 양산형 랭글러 JL이 공개되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디자인의 상당 부분은 전 세대의 그것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당초 지프는 지붕이 없어 하늘을 맞이할 수 있는 모델로 시작했는데, 이 또한 전통이 되어 모든 세대의 랭글러에는 지붕을 개방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함께 있었다. 물론 지붕 개방으로 성이 차지 않는다면 전면 유리를 접고 옆 문짝을 떼어낼 수도 있어 하드코어 오픈에어링도 가능하다.



바퀴의 상하 움직임을 최대화한 지오메트리 때문에 전륜 조향시 휠하우스와 타이어 어깨 부분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사다리꼴 형태로 펜더를 제작한 부분도 기능적인 헤리티지다. 배기가스 기준 강화로 디젤 엔진이 현행 코드명 JK 판매 라인업에서 빠져 있지만 3천만원대 중고 모델에서는 2.8L 디젤도 상태 좋은 매물을 찾아볼 수 있다.

연비나 진동 소음, 수동 시트 등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자동차이지만 몇 년간 애용했던 랭글러 4도어는 승차감이 생각 외로 나쁘지 않다. 험로 주파용으로 특화된 루비콘 모델은 엔진 토크를 네 배로 증폭시켜주는 특별 저속 기어 레버가 있다. 사용할 빈도가 많지 않겠지만 랭글러와 함께라면 어느 곳이든 점령할 수 있다는 자신감 스위치다. 장갑차를 운전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오프로드 매니아가 아니어도 각진 유리창을 통해 주변 차량을 내려다보며 운전하는 경험은 큰 만족감을 선사할 것이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강병휘(레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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