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단맛을 볼 수 있는 즉효약 된 SUV



[김형준의 숫자 깨먹기] 35.6%. 지난해 이맘때 <오토모티브 뉴스> 미국판은 ‘차세대 럭셔리 플래그십은 트럭(SUV)이 차지할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낸 바 있다. 대형 세단을 상징적 지위에 두던 유럽 럭셔리 브랜드들이 억대 금액의 대형 SUV를 새로운 플래그십으로 내세우려는 움직임이 보인다는 내용이었다. 사례는 얼마든지 많다. 멀게는 카이엔으로 브랜드 도약의 계기를 마련한 포르쉐부터 벤테이가 SUV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는 최근의 벤틀리까지. 람보르기니가 우루스 양산 모델을 얼마 전 공개했고, 컬리난으로 알려진 롤스로이스 SUV도 출시를 앞두고 시기를 조율 중이다. 하물며 페라리조차 고집을 꺾고 SUV 생산을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매체는 미국 딜러십 대표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들보다 한급 아래 프리미엄 시장을 이끄는 독일 프리미엄 3사도 분위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언급했다. X6로 넘어가는 7시리즈 고객이 적지 않고, 기존 플래그십 세단 고객 상당수가 새로운 고급 크로스오버 추가 구입을 고려 중이라는 설명이었다. 기사가 나온 뒤 1년여가 지난 지금 상황은 어떨까? BMW는 SAV 라인업의 꼭짓점인 X7를 내놨고, 메르세데스 벤츠는 낡디 낡은 GLS 클래스를 2019년경 풀 체인지하면서 메르세데스 마이바흐 버전을 추가할 거라는 소문이다. 레인지로버를 겨냥한 아우디의 풀사이즈 SUV Q8도 최근 심심찮게 테스트 중인 모습이 포착되고 있다. 시장(고객 선호도) 변화가 브랜드를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전통적인 모델(세단, 스포츠카)로 고상하게 영업해온 럭셔리·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들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적극적인 SUV 장사에 나선 이유는 간명하다. 승용차 시장은 점점 위축되는 반면 SUV 시장은 점차 커지고 있어서고, 미래 럭셔리 고객인 밀레니얼 세대가 SUV를 선호하기 때문이며, 비슷한 수준의 승용차보다 높은 값을 매길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대형/고급 SUV가 가장 잘 팔리는 미국 시장의 경우 지난 2016년 기존 럭셔리 승용차 판매는 전반적으로 줄어든 반면 럭셔리 SUV 판매는 전방위로 늘어났다. 전통적으로 소형차와 해치백, 왜건 등의 선호도가 높았던 유럽 시장도 SUV는 이미 대세다. 유럽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차급은 여전히 서브콤팩트로 분류되는 B 세그먼트 승용 부문이지만(지난해 3분기까지 217만여 대) 성장률 1, 2위는 모두 SUV(프리미엄 중형 및 콤팩트 SUV 29%, 콤팩트 및 중형 크로스오버 25%)가 차지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국내 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해 수입차 시장은 폭스바겐-아우디의 영업 중단에도 불구하고 2016년 대비 3.5% 성장한 23만3088대 판매를 기록했다. 와중에도 더 높은 성장률을 보인 브랜드와 하락한 브랜드가 있었는데, 20% 이상의 의미 있는 성장률을 기록한 브랜드 대부분은 SUV 라인업 강화로 이 같은 성과를 거뒀다. 수입차 브랜드 최초로 연간 판매 6만대를 넘어선 메르세데스 벤츠의 경우 지난해 총 1만2127대의 SUV를 판매했다. 이는 전년도 대비 3208대 늘어난 수치이며, SUV 전문 브랜드인 랜드로버(1만740대)에 비해서도 1387대나 많다.

피아트는 500X 재고물량을 큰 폭의 할인으로 털어내며 전년 대비 48.9% 성장했고, 시트로엥은 B 세그먼트 SUV인 C4 칵투스의 판매 호조(355대->690대)에 힘입어 27.1% 성장했다. 전해보다 22.2% 성장한 크라이슬러 코리아의 경우 지프 코리아로 사명을 변경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지프 브랜드에 의존도가 크다(전체 판매량 7284대 중 96%).



지난해 국내 브랜드 승용차 시장은 전년 대비 4만6475대 줄어든 129만6904대 판매에 그쳤지만 SUV의 경우 반대로 6720여대 늘어난 46만1390대 판매를 기록했다. 전체 승용차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15년 33.8%에서 지난해 35.6%로 한층 높아졌다. 하지만 국산 승용차 시장의 경우 SUV 판매 호조가 꼭 브랜드 실적 증가로 이어지진 않았다. 현대차는 승용차 판매량(미니밴, 트럭 등 제외)이 전년도보다 2만4,837대 늘었지만 SUV 판매량과 비중은 각각 1만4649대, 4.31%씩 빠졌다. 반면 기아차는 SUV 비중과 판매량이 41.1%에서 44.5%, 16만6719대에서 17만1684대로 확대됐음에도 전체 승용차 판매량은 2만663대 줄었다. 르노삼성 역시 지난해 SUV 판매량과 비중은 9475대, 12.3%씩 증가했지만 내수시장 판매량은 1만564대나 감소하며 쓴 맛을 봤다.



브랜드마다 속사정은 다르지만 지금 자동차 시장에서 성장의 단맛을 볼 수 있는 즉효약이 SUV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다수의 전문가 그룹은 향후 SUV 점유율이 35%까지는 다다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SUV는 지난해 1분기 기준 전 세계 점유율 30.6%를 기록했고, 판매량은 연말 기준 약 12% 상승했다. 2001년 100여 종에 불과하던 SUV 모델 가짓수가 2021년쯤이면 500여 종에 다다를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당장 국내만 해도 올해 굵직한 SUV 신모델이 줄지어 선보인다. 재규어 E 페이스와 볼보 XC40 등이 프리미엄 콤팩트 SUV 시장에 첫 발을 디디고, BMW X2(C 세그먼트 쿠페형 SUV), 재규어 I 페이스(전기 SUV) 등 새로운 SUV 시장을 개척하는 모델도 잇따른다. 국산차 시장의 싼타페 후속모델, 수입차 시장의 신형 티구안과 콤패스(지프) 등은 SUV 시장의 볼륨을 책임지는 모델들로 이목이 집중된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김형준 (모터트렌드 편집장)
저작권자 © 오토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