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비 교차한 크루즈와 K3,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153마력, 123마력



[김형준의 숫자 깨먹기] #1 지난 2월 13일, GM이 한국지엠 군산공장 폐쇄를 밝혔다. 설 연휴를 앞두고 이뤄진 폭탄 같은 발표였다. 내용은 공장 폐쇄만이 아니었다. 한국지엠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 노동조합, 정부와 주요 주주 등 주요 이해관계자에게 전폭적인 지원도 요청했다. 요청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상은 신차 배정이라는 미끼와 한국 내 일자리라는 인질을 양손에 쥐고 휘두른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안타깝지만 피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폐쇄가 결정된 군산공장은 GM의 유럽 수출기지였다. 하지만 지난 2013년 GM이 유럽에서 쉐보레 브랜드를 철수시키면서 골칫거리로 전락했다. 생산량이 빠르게 꺾였고, 최근 3년 공장 가동률은 20% 가량에 불과했다.



지난해 출시한 크루즈는 군산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근 10년 만에 풀 체인지한 신차가 성공하면 다소나마 숨통이 트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연간 26만대 생산이 가능한 공장의 지난해 생산량은 3만3,982대에 머물렀다. 그중 수출된 물량은 1만600대뿐이었다. 올 뉴 크루즈도 2만1,539대 생산되는 데 그쳤다. 그중 수출 길에 오른 건 7,642대, 내수 시장에 풀린 물량은 1만324대가 전부였다.



#2 한국지엠 군산공장 폐쇄 발표가 있던 그날, 기아자동차는 새로운 K3를 대중에 선보였다. 6년 만에 풀 체인지한 2세대 모델이었다. 2012년 등장한 1세대 K3는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데뷔 이듬해 5만1,279대 팔리며 부지런히 달렸지만 실적은 해를 거듭할수록 떨어졌다. 연간 판매량은 2016년 3만대 선(3만6,854대)으로 물러났고 지난해엔 2만8,165대로 그조차 무너졌다.



기아차는 젊은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수동변속기를 얹은 2도어 쿠페를 내놓기도 했고, 시작 가격을 성큼 내려보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아반떼라는 벽을 넘어설 수 없었고, 속절없이 판매량도 줄었다. 크루즈만큼은 아니지만 시장에서 존재감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하지만 K3는 크루즈와 달랐다. 지난 6년은 허송세월이 아니었다. 신형은 번듯한 제품으로 성장했다. 시장도 화답했다. 7일 동안 약 6,000건의 사전계약이 이뤄졌다.



#3 준중형 세단 시장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2014년 연간 판매 20만대가 무너진 준중형 승용차 시장은 지난해 그 규모가 15만대 미만(약 14만7,000대)까지 떨어졌다. 준중형 시장 부동의 1위인 현대 아반떼도 2010년대 초반 13만대 이상이던 판매량이 지난해 9만대 미만(8만3,861대)까지 떨어졌다. 2016년 하반기 투입한 밸류 플러스 트림 아니었으면 그조차 지탱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밸류 플러스는 17인치 휠, 스마트 트렁크, 열선시트 등 소비자 선호사양을 1,600만원대 값에 짜맞춘 실속형 모델이다. 소위 ‘가성비’ 제품이다.



한국은 일찌감치 ‘가성비’의 시대에 들어섰다. 경제성장이 정체되고 사회가 빠르게 고령화 되면서다. SUV의 유례없는 인기는 근거가 뚜렷하다. 용도가 다양하고 안전하다는 인식이 있는 SUV는 대표적인 ‘가성비’ 모델이다. 인기가 시들한 재래식 승용차가 이에 맞서려면 값이 싸거나 같은 값에 더 나은 가치를 제공해야 한다.

기아차는 시장 분위기를 빠르게 읽었다. 최근 출시한 제품들이 하나같이 ‘가성비’를 앞세우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스팅어는 가족과 함께 탈 수 있는 스포츠세단으로 주목 받았다. 디젤과 가솔린 엔진을 디튠해 얹은 스토닉은 대놓고 ‘역대급 가성비’를 셀링 포인트로 내세웠다. 뒤따른 K3 신모델도 예외가 아니다. 요즘 흔한 직분사 엔진 대신 포트 분사 방식(MPI) 엔진으로 생산원가를 낮췄다. 거기서 줄인 비용은 전방 추돌방지와 경고장치 같은 안전사양을 기본 적용하는 데 활용했다.



출력에 대한 욕심은 내려놨다. 1.6리터 4기통 MPI 엔진이 내는 힘은 123마력이 고작이다. 대신 CVT를 보태 연료효율을 챙겼다. 가솔린 1리터로 15.2km를 달린다. 기아차는 경차급 연비라고 자랑한다. 사전계약자에게는 10년/10만km라는 파워트레인 보증 혜택까지 안겼다. 두루두루 잘 갖춰진 차를 부담 없이 구입해서 천년만년 타라는 얘기다. 새로운 K3는 철저하게 실리를 따진다. ‘가성비의 시대’에서 입지 좁은 제품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물론 사전계약 건수로 K3의 성공을 점치는 건 섣부르다. 그랜저 IG(사전계약 첫날 1만6,000대), 최근의 싼타페 TM(8영업일에 사전계약 1만4,000대 사전계약)에 비하면 세발의 피 수준이기도 하다. 하지만 준중형 승용차 시장의 최근 분위기에 비춰보면 신형 K3의 출발은 꽤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4 기아 K3가 꽃길을 찾아나선 그날, 한국지엠과 군산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쉐보레 크루즈는 출시 1년여 만에 단종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지나치게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라고? 아니다. 으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한국지엠이 시장 변화를 기민하게 따르지 못한 까닭이다. 실상은 달라진 시장 분위기에 대처할 의지는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의심은 의심에 그칠 뿐이다. 그들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의사결정은 더뎠고, 제품개선의 길은 체증처럼 꽉 막혀 있었다. 미국 GM에 종속된 채 서서히 자생력을 잃어간 까닭이다.

속속 드러나는 한국지엠의 현실은 GM의 한국 생산기지나 다름없다. 오늘은 크루즈와 올란도가 은퇴하지만 다음 차례는 중형 세단, 소형 해치백, 경차일 수 있다. K3와 크루즈의 운명을 가른 공장 폐쇄, 단종의 불길은 아직 제대로 번지지도 않았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김형준 (모터트렌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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