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로 풀어본 유럽 올해의 차

[김형준의 숫자 깨먹기] 325점. 제네바 오토살롱이 지난 8일 시작됐다. 유럽 한복판 중립국 스위스에서 열린다는 지리적 특성, 그해 가장 먼저 열리는 유럽 메이저 모터쇼라는 시기적 특징이 맞물려 있어 유럽 자동차 시장의 한해 흐름을 짐작하기에 그만인 행사다. 제네바 오토살롱은 또 다른 점에서 의미 깊은데, 바로 개막에 앞서 ‘유럽 올해의 차’가 발표되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다양한 ‘올해의 차’(Car of the Year, 이하 COTY) 행사가 열리는데 유럽 COTY는 역사와 명성, 신뢰도에 있어 그중 단연 으뜸이라 할 만하다.



올해도 유럽 COTY가 제네바 쇼 직전에 공개됐다. 스웨덴 볼보가 처음 만든 프리미엄 콤팩트 SUV XC40이었다. XC40은 일곱 대가 모인 최종결선에서 심사위원들로부터 325점을 획득, 세아트 이비자(242점)와 BMW 5시리즈(226점)를 제치고 정상에 올랐다. 이는 볼보의 첫 유럽 COTY 수상인 동시에 프리미엄 브랜드의 SUV로는 최초의 영예이기도 했다. XC40이 유럽 올해의 차 수상에 힘입어 전 세계에서 인기몰이를 할 수 있을까? 가능성은 반반이다. 유럽 COTY의 지난 55년 역사를 주요 숫자로 되돌아보면 어렴풋이 그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 55년

유럽 COTY는 1964년 처음 시작해 올해까지 55년간 이어져왔다. 유럽 COTY 위원회는 유럽 주요 자동차시장을 대표하는 자동차 전문매체로 이뤄진다. 현재는 영국,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스웨덴 등 7개국 7개 매체가 이끌고 있다. 심사위원 구성은 보다 범유럽적이다. 유럽 23개국에서 활동하는 자동차 저널리스트 60명이 심사에 참여한다. 심사대상 모델은 수상작 선정에 앞서 12개월 내에 출시한 신모델 중 연간 5000대 이상 판매가 예상되며, 최소 유럽 5개국에서 출시한 모델을 대상으로 한다. 이 같은 선정 기준 때문에 충격적인 성능을 지녔지만 생산량이 극히 제한적인 슈퍼카나 초호화 럭셔리 모델은 유럽 COTY 근처에 얼씬도 할 수 없다.



◆ 25점

유럽 올해의 차는 결선에 오른 일곱 대의 후보작 중에서 선정된다. 심사위원들은 디자인, 안락함, 안전성, 경제성, 핸들링, 퍼포먼스, 기능성, 환경요구, 운전자 만족도, 가격 등의 항목에 따라 후보작을 평가하고 점수를 매긴다. 모든 심사위원은 각각 25점의 포인트를 보유하고, 이를 결선 후보에 나누어 부여한다. 최소 5대에 점수를 주어야 하고, 한 차에 10점 이상의 포인트는 줄 수 없다. 심사위원 60명의 평가점수를 합산해 최고점을 얻은 차가 ‘올해의 차’에 등극한다.



상대평가인 만큼 매해 수상작의 획득 점수는 천차만별이다. 푸조 405는 464점으로 역대 최고점수를 얻으며 1988년 올해의 차를 수상한 반면, 2007년 수상작인 포드 S맥스가 획득한 점수는 235점에 불과하다. 지난 기록을 보면 이 같은 점수차는 결선에 오른 경쟁작의 수준에 크게 좌우된 경향이 있다.



◆ 212점과 1점

예컨대 푸조 405(1988년)와 폭스바겐 7세대 골프(2013년)는 각각 시트로엥 AX와 토요타 86/스바루 BRZ를 212점 차이로 제치고 그해 올해의 차에 선정됐다. 405와 7세대 골프가 유럽 자동차 사회에 미친 영향에 비하면 평범한 소형차 AX와 일본 스포츠카 86/BRZ의 존재감은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알파로메오 147(2001년)과 오펠 인시그니아(2009년)는 2위 모델보다 겨우 1점 앞선 총점으로 겨우 그해 COTY에 올랐다. 이들의 당시 경쟁작은 포드 몬데오와 피에스타였다. 유럽은 초창기 레이싱 무대를 휩쓴 알파로메오와 포드에 대한 애착이 깊다. 그리고 피에스타와 같은 B 세그먼트 해치백을 향한 내리사랑도 유명하다.



◆ 9회와 1회

유럽 COTY가 유럽 자동차 문화의 바로미터라는 사실이 여기서 드러난다. 9회는 이탈리아 피아트가 유럽 COTY를 수상한 횟수다. 1967년 소형 패밀리 세단 124로 처음 수상했고 이후 128, 127, 티포와 푼토 같은 작고 실용적인 해치백으로 8번 더 정상에 올랐다. 마지막 수상작은 2008년의 친퀘첸토(500)다. 공교롭게도 친퀘첸토는 2008년 COTY 수상 이후 단 한 번의 모델 체인지 없이 10년을 ‘강제’ 장수 중이다. 피아트의 예에서 보듯 유럽 COTY는 B-C 세그먼트 해치백이 주름잡아왔다.



반면 프리미엄 모델, 스포츠카, SUV나 MPV와 같은 유틸리티 차량은, 세계적 명성과 달리 유럽 COTY에선 부진을 면치 못했다. 유럽 COTY 55년 역사에서 프리미엄 브랜드가 수상한 횟수는 7번이 고작이다. 아우디(80, 1973년)가 처음이었고 올해의 볼보(XC40)까지 정상에 오른 브랜드도 5곳(아우디, 알파로메오, 메르세데스 벤츠, 포르쉐, 볼보)에 불과하다. MPV와 SUV가 수상한 횟수는 각각 2회뿐이다. SUV는 지난해와 올해 2년 연속(푸조 3008, 볼보 XC40) COTY를 거머쥐며 최근의 인기를 입증했다. 유럽 COTY에 오른 스포츠카는 딱 하나뿐이다. 1978년의 포르쉐 928이다. 928은 911 대체 모델로 고려됐던 GT카로 당시 BMW 7시리즈(E23)와 포드 그라나다를 제쳤다.



◆ 5번과 4위

유럽은 세계 어느 곳보다 진입이 어려운 시장이다. 이미 각국에 자리 잡은 유럽 자동차 브랜드가 많기도 하고, 유럽인들의 소비 성향도 상당히 보수적(혹은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비유럽 자동차 브랜드가 유럽 COTY에 오른 횟수는 매우 제한적이다. 모두 5번으로 그중 4번이 일본(1993년 닛산 마이크라, 2000년 토요타 야리스, 2005년 토요타 프리우스, 2011년 닛산 리프)이었고 나머지 한번은 미국(쉐보레 볼트 PHEV)에 돌아갔다. 볼트가 독일 오펠에서 암페라로 공급됐음을 생각하면 실상 비유럽 브랜드 수상기록은 모두 일본이 차지한 셈이다. 수상작의 면면은 유럽이 사랑하는 슈퍼미니 클래스 해치백(마이크라, 야리스), 유럽이 갖지 못한 혁신적 신모델(프리우스, 리프)이었다.



대조적으로 한국 브랜드는 아직 존재감이 미미하다. 그중 가장 성공한 곳이 기아차로, 2008년 씨드와 2018년 스팅어를 유럽 COTY 결선에 올린 바 있다. 두 제품의 최종성적은 모두 4위. 심사위원들의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대체로 “한국이 이런 차를 만들었다니!”거나 “이 가격에 이만한 차를!”이었다.

올해 스팅어는 BMW 5시리즈(226점)에 22점 뒤진 204점으로 4위에 올랐다. 심사위원 60명 중 6명이 스팅어를 1위로 꼽았으니까 상당히 선전했다고 할 수 있다. 영국 존 시미스터 기자는 “BMW 같은 역동성을 지녔지만 그보다 더 날카로운 스포츠 세단”이라는 평가와 함께 스팅어에 심사위원 중 가장 높은 9점을 부여했다. 반면 프랑스 장-미셸 노르망 기자는 “클래식 GT의 요소를 영리하게 버무렸다. 하지만 지나치게 미국에 전념했다”고 평하며 1점도 부여하지 않았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김형준 (모터트렌드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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