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대를 앞선 첨단 기술의 상징, 기아 플래그십 세단의 역사
흔히 최고급 자동차를 가리키는 플래그십(Flagship)은 역사상 가장 많은 지리적 발견이 있었던 15세기, 대양을 가르던 대항해 시대에 유래했다. 미지의 세상으로 가는 탐험을 위해 험한 바다를 건너야 했기에 여러 척의 배가 선단을 이루어 움직였고, 이 중 가장 지위가 높은 탐험 대장이 탔던 배에 함대를 대표하는 깃발을 걸면서 붙은 이름이다. 전투력을 비롯해 크기나 속도, 탑승인원 등 당시 최고의 기술력이 동원된, 모든 면에서 가장 앞선 배에 쓰였다.
자동차에서는 브랜드를 이끄는 최고급 세단을 가리킬 때 종종 사용한다. 배에서 그랬던 것처럼 당대에서 가장 앞선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가장 큰 배기량과 가장 긴 차체, 첨단 기술 등을 사용해 브랜드의 기술력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1962년부터 자동차를 생산해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에 묵직한 선을 그은 기아자동차에서 플래그십의 역할을 해온 차들의 의미도 남다르다.

기아자동차에서 진정한 플래그십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1997년에 나왔던 엔터프라이즈다. 1997년 3월 판매를 시작한 엔터프라이즈는 ‘한국대표(韓國代表)’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당대 최고의 정통 후륜 구동 대형 세단이었다. 당시 국산 승용차 최대 배기량인 V6 3.6L 230마력 엔진을 얹었고, 역시 국산차 중에서 가장 빨랐던 최고시속 230km를 내 말 그대로 최고의 차였다.

또 대형차에는 최초로 프레임리스 도어를 써 문을 열었을 때 날렵한 모습을 갖췄고 격자형 그릴은 우리 전통 창틀에서, 엠블럼은 기아의 K와 봉황의 모습을 형상화해 한국적인 디자인 요소를 더했던 것도 특징이다. 당시 사양면에서도 국산차 처음으로 파워 폴딩 미러와 뒷좌석 전용 2열 음료 보관용 냉장고, 16단 조절식 서스펜션 등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이 아낌없이 쓰였던 차였다.

그 뒤를 이은 것은 오피러스였다. 플랫폼이 앞바퀴굴림으로 바뀌기는 했지만 플래그십의 위치는 그대로였다. 특히 대형 세단으로는 유일했던 포멀 루프(Formal Roof)는 급하게 떨어지는 C 필러와 수직으로 서 있는 뒷유리 등으로 매우 독특한 보디라인을 만들었다. 포멀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공식적’인, 혹은 ‘의례를 갖춘’ 것을 의미한다. 과거 마차 시절부터 공식적 정장을 입은 남자들은 높은 모자를 써야 했기에 넉넉한 머리 공간이 필요했고 자연스럽게 보디의 높이도 올라갔다. 마차들의 평평한 지붕과 수직으로 떨어지는 뒷모습이 만들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이후 자동차의 시대가 열리면서 이런 특성이 이어졌다.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고급 대형차는 2열 끝까지 지붕선이 이어지고 수직으로 떨어지는 보디 스타일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운전기사를 두고 뒷좌석에 VIP를 모시는 용도인 쇼퍼 드리븐(Chauffeur-driven) 자동차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오피러스는 포멀 루프를 통해 고급스러운 뒷자리 전용 모델의 위상을 유지하며 대형차 판매 1위에 올라 크게 성공했고, 정비 센터에서도 오피러스만의 별도 공간에서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좋은 반응을 얻어 기아자동차의 플래그십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엔터프라이즈가 단종한 지 10년이 지난 2012년 후륜구동 대형 플래그십 세단이 돌아왔다. K시리즈의 최상위 모델인 K9이 그 주인공이다. 데뷔 당시에 역시 국산차에서는 처음으로 헤드업 디스플레이, 어댑티브 풀 LED 헤드라이트, 후측방 경보 시스템과 적응형 크루즈 컨트롤 등 첨단 편의 및 안전 사양을 아낌없이 적용했다. 미국에는 K900으로 팔렸는데, 2015년 세계 올해의 차(Car of the Year) 럭셔리카 부분의 최종 후보 10대에 포함되는 일도 있었다. 당시 후보에 오른 차에는 벤츠 S클래스 쿠페와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레인지로버 오토바이오그래피 등 쟁쟁한 세계 명차들로 K9의 위상을 한껏 인정받는 계기가 됐다.

최근 뉴욕 모터쇼에서 기아차 플래그십의 명성을 이어갈 새 K9이 글로벌시장에 첫 선을 보였다. 코드명 RJ로 알려진 The K9에는 역시나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첨단 안전 사양들이 들어갈 예정이다. 특히 주목받는 것은 지도 데이터와 연결되어 더욱 정밀한 제어가 가능해진 내비게이션 기반 스마트크루즈 컨트롤(NSCC-C)와 터널 연동 자동제어 기능이다. 지금은 많은 자동차회사가 자율주행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이는 주변 상황을 인지하고 판단한 다음 행동에 옮기는 3단계로 이루어지는데, 특히 인지 단계는 다양하고 민감한 센서가 필요해 높은 기술력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를 간단하면서도 섬세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정밀한 지도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제어다. The K9에 적용될 내비게이션 기반 스마트크루즈 컨트롤은 단순히 위치를 확인하는 것을 넘어 지도에 표시된 도로의 곡율, 즉 얼마나 길이 휘어 있는지를 미리 확인하고 그에 맞춰 속도를 낮추고 코너를 빠져나가면 다시 설정한 속도까지 가속하는 첨단 기능이다. 급한 커브길을 안전하게 달릴 수 있는 것은 물론 차의 기울어짐도 줄어 불안감을 느낄 일도 없어진다.

터널 연동은 역시 GPS 정보로 차의 위치를 항상 파악해 전방에 터널이 있을 경우 미리 열려있는 창문을 닫고 공기 순환을 내기로 돌려 외부의 오염된 공기가 실내에 들어오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역시 터널을 빠져나가면 외부 공기 유입 상태로 돌아가 신선한 공기가 실내로 들어올 수 있도록 자동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내비게이션 및 GPS와 연동된 기술은 정밀한 지도가 바탕이 되어야 하므로 아무리 비싼 수입차에서도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섬세하게 탑승자를 배려했다고 할 수 있다.

플래그십 모델을 만드는 것은 쉽지 않다. 브랜드 전체를 이끄는 것은 물론 날로 경쟁이 치열해지는 프리미엄 시장에서 분명한 존재감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각 시대를 대표하는, 아니 앞서나가는 신기술을 가장 먼저 쓰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히 상품성을 높이는 것 뿐 아니라 그 차를 타는 사람들의 자부심까지 채워줄 수 있어야 진정한 플래그십이 된다. 기아자동차 플래그십의 역사를 잇는 The K9이 어떤 새로운 것으로 채워질지 궁금하다.
이동희 자동차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