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잘란 기자의 꿈속의 꿈은, 그저 꿈으로 끝날까?
[최윤섭의 횡설소설] 결국 세 녀석만 남았다.
산골초등학교 학생수는 모두 16명. 남녀 학년 구분 없이 반으로 나눠 공을 차지만 그래도 세 명이 부족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넘어지고 자빠지고 흙투성이에 무릎도 까졌지만, 두 시간이 후딱 지났다. 겨우겨우 달래 하교를 시켰는데, 세 녀석만은 축구골대 옆에 앉아있다.
옅게 드러나는 보조개가 귀여운 김재능의 꿈은 자동차 디자이너. 학교 담벼락을 온통 자동차그림으로 도배한 범인이다. 그림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섬세한 솜씨는 아니지만 무슨 차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차의 특징을 제대로 잡아낸다.
뽀로로 안경을 쓴 최현가 군의 꿈은 과학자. 과학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과학자가 되겠단다. 뜯고 조립하고, 부수고 붙이고, 기계만 보면 가만히 두지를 않는다. 언젠가 경운기를 완전히 분해해볼 생각이다. 사실 집에서 아빠가 부리는 포터를 노렸지만, 이를 눈치 챈 아빠가 자동차 옆 10미터 접근금지령을 내렸던 것.
짙은 쌍꺼풀에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박기부는 대기업 회장을 마음속에 품고 있다. 두 가지 이유인데, 돈을 많이 벌어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줄 생각이다. 또 다른 하나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차를 타고 싶다. 웬만한 차 이름은 다 꿰고 있다.

녀석들은 학교에서 자동차박사로 통하는 삼총사다. 기부가 친구들 얼굴을 보며 가방을 열심히 뒤진다.
“속이 훤히 다 보이는 건, 현가 너 가져. 현가야 이게 서스펜션? 김재능! 이건 너꺼. 날개 달린 SLS! 똑같이 저쪽 벽에 한 번 그려봐.”
어제 삼촌이 모형자동차를 한 다발 가져왔는데, 친구들과 나누는 것이다. 모래 위에 굴리고, 벽에 그림 그리고, 돋보기로 살피고. 날이 저물도록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른다. 결국 여기저기서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너희들 또 차야? 뭐 그리 할 얘기들이 많아? 밥 먹으러 가자”

김인자 선생님에게 이 광경은 일상이다. 가끔은 대화에 끼어든다. 아이들 질문 공세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선생님 역시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과거가 떠오르기도 한다. 디자인을 전공했고, 자동차 디자인 공모전에도 몇 번 참가했던 것. 그런데 6개월 뒤면 학교를 옮겨야 한다. 며칠 전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냈다. 떠나기 전, 녀석들과 특별한 추억을 남기고 싶었다.
주차장으로 변해버린 강남대로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 나잘란 기자. 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대한민국 자동차산업이 그에게 그런 역할을 맡긴 적은 없다. 약속시간을 맞추지 못할까 짜증 폭발 직전이다. 라디오는 듣는 둥 마는 둥, 혼자 씩씩거리고 있다. 순간, 김인자 선생님의 사연이 나잘란 기자 머릿속에 훅 들어온다. 여기저기 전화를 돌린다.

“경식아! 약속은 깨라고 있는 거 알지? 미안미안. 미팅 다음으로 미루자, 내가 밥 살게.”
“인는척 기자! 바쁘지 않으면 얼굴 좀 봐, 할 얘기 있어. 좋은 건수야!”
“설내발 기자, 어디야? 대박 하나 있는데, 신사동으로 나와!”
신사동 설렁탕집. 인는척 기자와 설내발 기자가 나잘란 기자의 설명에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함께하기로 한 표정이다. 마음이 통했던 걸까? 메르세데스-벤츠가 자동차는 그래도 S-클래스라며, 흔쾌히 수락했다. AMG 스피드웨이로 친구들을 초청하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BMW는, 앞으로는 전기차시대라면서 i3와 함께, 녀석들이 BMW 드라이빙센터에 방문해주면 큰 영광이라는 말까지 건넸다. 꼬맹이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할 차는 R8 아니겠냐며 아우디 역시 나잘란 기자 아이디어에 한 표를 보탰다. 렉서스가 최첨단 하이브리드 기술의 정수 LS500h를 보여주겠다는 말과, 자동차 사운드의 진수를 꼬맹이들에게 들려주겠다는 마세라티 담당자의 오케이 사인이 동시에 떨어졌다. 요즘은 SUV가 대세고 SUV와 랜드로버는 동격이라며, 랜드로버가 레인지로버 형제들을 내보내겠다고 힘을 더해준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덕에 나잘란 기자 얼굴에는 연신 웃음꽃이 피지만, 마음 한편에는 왠지 모를 허전함이 있었다. ‘그래 한 번 가보자.’
현대차 관계자는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맥이 확 빠진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 끝나는 걸까?’
“나 기자,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했죠? 미래는 수소차 아닙니까? 넥쏘가 좋겠네요. 그리고 한 가지 더. 트랜스포터 넉 대도 준비했습니다.”

20년차 자동차전문기자. 자동차메이커를 돌며 ‘재능기부, 사회공헌, 사회환원, 어린이, 대한민국 미래, 꿈, 이상’ 등 좋은 말이란 말은 죄다 동원하긴 했지만, 이처럼 일이 120퍼센트 완벽했던 적은 없었다. 성공확률은 반도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뜬구름 잡지 말라는 핀잔만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싶었다. 남들보다 한 대라도 더 팔아야 하고, 남들보다 한 건이라도 더 써야 살아남는 세상, ‘우리 함께’라는 말이 통할까 싶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꿈인가?
15대. 아니 트랜스포터까지 모두 19대다. 작은 운동장에 멋지게 꾸미는 일만 남았다. 트랜스포터에 차곡차곡 싣고 산골초등학교로 출발.

김인자 선생님은 10분 사이 창밖과 시계에 던지는 눈길이 벌써 다섯 번째다. 드디어 왔다. 와우!
“창가에 앉은 재능이 하고 기부는 커튼 좀 칠래? 햇볕이 너무 뜨겁네.”
차를 조심조심 내리고, 예쁘게 세운 뒤 간략한 설명을 적은 임시간판물도 설치했다. 한연설 기자를 중심으로 뜻을 같이 하기 위해 내려온 기자들이 차 앞에 섰다. 저마다 한 마디씩 한다.
“왜 이렇게 떨리지?”
“너무 어려운 거 묻는 거 아냐?”
“대답 못하면 어쩌지?”

많이 듣던 노래다. <꼬마자동차 붕붕붕>이 수업이 끝났음을 알린다. 엄청난 함성을 지르며 삼총사들과 함께 친구들이 몰려온다.
“아저씨! S-클래스 맞죠? 와! 4매틱이네. x드라이브와 차이가 뭐에요? V12를 W16으로 늘릴 수 있어요? 그런데 범블비는 안 왔어요?”
“아저씨! R8이 처음 나왔을 때 람보 가야르도와 플랫폼을 같이 쓴다고 했는데,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 차 뒷바퀴는 왜 안 움직여요?”
“아저씨! 레인지로버하고 카이엔하고 싸우면 누가 이겨요? 막 싸운다는 게 아니라 온·오프로드 능력을 종합적으로 비교했을 때 누가 더 낫냐고요?”
“아저씨! 저 큰 트럭 운전할 줄 알아요? 태워주세요.”
쏟아지는 질문에 정신이 없다. 기자들의 눈빛이 한연설 기자에게 향한다. ‘아는 밑천 다 드러나겠는 걸, 질문이 왜 이렇게 어려워.’ 이를 눈치 챈 듯 한연설 기자가 시승코스를 미리 돌아본다며 자리를 뜬다.

저 멀리 뿌연 먼지 사이로 클래식 재규어 XJS가 달려온다. 자동차박물관 정나눔 관장이 푸조 관계자와 같이 왔다.
“나잘란 기자, 이 행사 내가 먼저 이야기했던 거잖아. 진짜 서운해. 박물관에 있는 차 다 가져올 수 있었는데….”
“인는척 기자! 시간 좀 넉넉히 줘. 번갯불에 콩 볶는 것도 아니고, 이거 인쇄하느라 좀 늦었어. 제주도에 박물관 열잖아. 초대장이야. 꼬맹이 친구들 모시고 와.”
시골마을 운동장이 모터쇼장이 되었다. 자동차그림 낙서로 빽빽한 담벼락이 화려한 부스를 대신했고, 아이들 얼굴에 핀 웃음꽃이 번쩍이는 조명보다 환했으며 무르익는 꿈이 수백 수천 명 관람객 함성보다 우렁찼다.
12명의 자동차전문기자들이 꼬맹이들 질문에 진땀깨나 흘리고 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최윤섭
최윤섭
cyseop@daum.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