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드걸, 없애야 할 사회악일까?

“성 상품화냐 꼭 필요한 경기의 일부냐. F1 그리드걸 폐지를 두고 말들이 많다. 그리드걸의 역할을, 누가 어떻게 할지 깊이 고민해야 할 때다.”



[임유신의 업 앤 다운] F1에서 그리드걸이 사라졌다. 올해 첫 경기인 호주 그랑프리부터 그리드걸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드는 모터스포츠에서 출발 위치를 말한다. 그리드걸은 F1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출발점에서 선수와 팀 이름 국가가 적힌 팻말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에게는 레이싱걸로 익숙한데, 2000년대 중반 이후 레이싱모델이라고 부른다. 해외에서는 그리드걸 이외에 피트걸, 패독걸, 엄브렐러걸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피트에서 드라이버들을 큰 양산을 들고 햇빛을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해서 엄블렐러걸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그리들걸이 경기장에서 하는 일은 은근히 많다. 경기 시작 전 선수와 팀 정보를 알려주는 역할 외에 드라이버 퍼레이드와 시상식 등을 지원하고 소속팀 선수를 응원한다. 관람객의 사진 촬영에 응하는 등 관중과 소통을 통해 경기장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도 한다. 입는 의상에는 주요 후원사 로고를 새겨 홍보 효과를 내기도 한다. 이처럼 경기 전반에 걸쳐서 주어진 다양한 역할을 해낸다. F1뿐만 아니라 여타 모터스포츠에도 등장하고, 모터쇼 같은 자동차 전시 행사에도 참여한다. 자동차 관련 행사 외에 사이클, 복싱과 격투기 등 여러 스포츠에 등장한다.

그리드걸이 문제가 된 가장 큰 이유는 성 상품화다. 대체로 그리들걸은 노출이 많은 옷을 입고 선정적인 포즈를 취하는 탓에 성 상품화 논란이 끊임없이 일었다. 본연의 임무로 주목받기보다는 눈요깃감 역할이 더 컸다. 모든 그리드걸이 성적 매력을 부각하는데에만 치중하지는 않았지만, 그리드걸을 바라보는 대부분 사람이 눈요깃감으로 여기는 게 현실이다.



F1 그리드걸 만의 문제가 아니었기에 오래전부터 여러 곳에서 논란은 있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모터스포츠에도 그리드걸(레이싱모델)이 활동한다. 하는 일은 F1 그리드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터스포츠에서는 크게 문제 된 적은 없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모터스포츠가 대중적이지 않아서다.

오히려 논란이 큰 곳은 모터쇼다. 서울모터쇼나 부산모터쇼 같은 대규모 모터쇼에는 레이싱걸이 수백 명이 나온다. 노출이 많은 복장이 연령 구분 없는 관람객층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는다. 업체들이 자동차로 관람객을 끌기보다는 레이싱모델로 부스 방문을 유도한다는 비난도 따랐다. 레이싱모델 사진을 찍으러 모터쇼를 찾는 사람들도 상당수여서 자동차쇼가 아니라 레이싱모델쇼라는 비난도 일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의견도 상당했다. 모터쇼는 자동차가 주인공이지만 종합적인 이벤트인 만큼 부가적인 볼거리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모터쇼마다 특색이 있는데 레이싱모델이 우리나라 모터쇼의 차별화된 특징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한동안 붐이 일었던 모터쇼 레이싱모델은 몇년 전부터 진정되는 분위기다. 수가 대폭 줄었고 복장도 노출이 없거나 덜한 쪽으로 바뀌는 추세다. 단순히 차 옆에 서 있는 모델 대신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모델을 배치하는 곳도 생겼다. 여성과 함께 남성 모델을 세우는 업체도 있다. 레이싱모델로 관심을 끄는 전략보다는 차에 집중하는 분위기가 자리 잡아가고 있다.



F1 그리드걸 폐지도 찬반이 갈렸다. 폐지를 주도한 F1 측은 현대 사회 규범과 맞지 않고 F1이 추구하는 가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주요 이유로 내세웠다. 여성단체들의 지지가 이어졌고 F1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도 F1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전통이고 수많은 그리드걸이 일자리를 잃는다는 이유다. 모터스포츠 인사들이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고, 온라인 설문에서 폐지하지 말자는 쪽에 더 많은 찬성이 나오기도 했다.

찬반은 아직도 계속되지만 어쨌든 현실은 F1에서 그리드걸이 사라졌다. 다른 분야까지 확산하는데 앞서 이것이 정말 잘하는 일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도 레이싱모델이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여러 사람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는 사회악이 아닌 이상 개선하고 발전시키는 방안을 찾는 게 우선이다. 레이싱모델이 개선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폐지해서 마땅한 사회악은 아니라고 본다. 레이싱모델도 엄연한 직업이다. 그들 나름대로 투철한 직업 정신을 가지고 일한다. 강압에 의한 것이 아닌 본인이 선택한 결정에 타인이 관여하는 것도 문제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개선해나가면 된다. 성의 상품화로 여겨질 부분은 없애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노출이 심한 옷을 자제하고 성적으로 어필하는 요소는 규제하는 등 건전하게 운영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리드걸을 필요로 하는 쪽도 대회 일부로서 그리드걸의 역할을 존중한다면 건전한 변화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몇 년 후면 사라질 직업에 대한 뉴스가 종종 나온다. 그리드걸도 그 명단에 이름이 올라갈 가능성이 크다. 한때 잘 나가던 직업도 필요가 없어지면 사라지는 게 시대 변화의 한 모습이다. 다만, 강압 때문에 사라지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무엇이든 급하면 탈이 나는 법이다.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검토하고 고쳐나가야 한다. 그리드걸 문제는 단순히 여성 인권 관점에서만 논할 일은 아니다. 그리드걸은 모터스포츠 대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다. 이 역할을 여성이 하느냐 마느냐를 떠나서, 누가 어떤 식으로 어떻게 해나갈지 고민해야 할 시기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임유신( 한국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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