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발걸음 늦춰지면 자동차 산업도 살아남기 어려워



[김형준의 숫자 깨먹기] 100만 명. 넷플릭스(Netflix)가 국내 가입자 100만 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보도의 출처가 통계/분석업체 닐슨코리안클릭의 조사이고, 내용을 뜯어보면 그게 순수 가입자인지 혹은 이용자의 숫자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넷플릭스가 요즘 가장 뜨거운 미디어 플랫폼 중 하나인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미국에선 이미 기존 케이블TV 가입자를 추월했고, 주가총액으로도 21세기 들어 미디어 공룡으로 거듭난 디즈니를 뛰어넘은 현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실상 눈길을 끈 건 해당 기사의 막바지에 있었다. 국내 동영상 시장 피해를 우려한 국내 지상파 방송사들이 방송통신위원회에 (넷플릭스에 대한) 정책적 대응을 요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또 규제 타령인가’ 싶어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규제는 완전히 새로운 생태계가 자리 잡을 즈음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화두다. 명분은 한결같다.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시계를 10여 년 전으로 돌려보면 ‘위피’ 논란이 있었다. 위피는 2005년경 등장한, 데이터 통신이 가능한 휴대전화를 위한 표준 모바일 플랫폼이었다. 휴대전화 사용자들은 위피 플랫폼의 통신사 서비스를 통해 벨소리도 주문하고, 게임도 즐겼다. 신세계였지만 그 감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대한민국 안에서만 통용되는 표준인 탓이었다.



한국 휴대전화가 위피라는 틀에 갇혀 있는 사이 미국에선 애플 아이폰이 등장했다. 아이팟(MP3)과 휴대전화와 인터넷 통신기기를 매끈하게 융합한 아이폰은 전 세계적 인기를 얻었다. 성공 배경엔 앱스토어도 있었다. 한국 표준인 위피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연하고 매력적인 콘텐츠 생태계였다. 사람들은 스마트폰 시대의 개막에 열광했지만 한국은 예외였다. 애플은 아이폰에 위피를 탑재할 계획이 없었기 때문이다. 2007년 선보인 아이폰은 결국 2009년 말이 돼서야 한국에 출시됐다. 2009년 4월, 방송통신위원회가 위피 탑재 의무화를 폐지한 이후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차량공유 서비스로 유명한 우버는 자가용 운전자와 승객을 연결하는 우버 X를 2014년 한국에 선보였지만 6개월여 만에 서비스를 중단해야 했다. 택시노조 등 기존 운수사업자들의 격렬한 반대 때문이었다. 택시운전자들의 격한 반응에 움찔한 서울시는 몸소(?) ‘우버 파파라치’ 조례를 실시하는 촌극까지 벌였다. 이와 관련한 갈등은 아직 풀리지 않은 채다. 카카오모빌리티가 내놓은 유료호출서비스는 유명무실한 반쪽짜리 서비스로 전락했다.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국내 2위 카셰어링 업체인 럭시에 50억원을 투자했지만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발을 뺐다. 언급한 일련의 사건엔 택시업계의 강력한 반발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최근에는 국내 카풀서비스 1위 업체인 풀러스의 김태호 대표가 사임했다. 이 회사는 직원 70%를 감원하는 대대적인 구조조정 계획까지 내놓은 상태다. 풀러스는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상의 ‘카풀’ 조항에 근거해 시작한 스타트업 회사다. 회원은 빠르게 늘었고 1년여 만에 네이버, SK 등으로부터 대규모 투자도 유치했다. 하지만 출퇴근 시간대에 국한돼 있던 이용시간 제한을 없애려 하자 즉각 벽에 부딪혔다. 과도한 마케팅 비용 지출로 인한 경영난, 투자사의 압박 등 다양한 이유가 거론되지만 풀러스와 같은 각광받던 스타트업이 좌초 위기에 처한 가장 큰 원인은 기존 산업계의 반발과 표심 이탈이 두려워 이에 동조한 정부/지자체/행정기관의 소심한 ‘규제’에 있다.

국내 산업계의 문제는 규제가 ‘보호’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걸로 비춰진다는 점이다. 일례로 전기자동차 보급에 필수인 급속 충전기도 그 규격을 표준화하는 데 불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허비했다. 수년간 보급해온 차데모와 교류3상을 버리고 DC콤보(타입1) 방식으로 통일하기로 한 것이다. 차데모는 일본 제조사와 한국의 현대차그룹이, 교류3상은 프랑스 르노가 채택한 방식이며 DC콤보는 미국의 충전 표준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계 자동차회사 관계자는 “일찍이 DC콤보 방식으로 통일했으면 비용이 절감돼 지금보다 더 많은 충전기를 설치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정부 정책은 자국에서 가장 기술수준이 높은 기업의 속도에 발맞춰가는 게 자연스럽다. 자국 산업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도, 새로운 기술 표준 정착의 위험부담을 줄인다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외국계 기업의 볼멘소리도 분명 귀담아들어볼 필요가 있다. 세계적인 흐름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안타깝지만 한국은 세계의 기술 표준을 이끌어갈 만큼 시장이 큰 것도, 영향력이 막강한 것도 아니다.



‘왜 더 많은 차를 만들고 길을 내도 교통으로 인한 우리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 걸까. 이미 우린 가진 것이 충분한데 단지 이걸 나누는 공유의 고리가 없어서 아닐까?’ 승차공유 스타트업 풀러스의 김태호 전 대표가 올해 초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귀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등장했을 때 기존 산업계가 저항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기득권의 유지나 보호를 위해 혁신의 발걸음이 늦춰진다면 그건 매우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 요즈음의 혁신은, 개그맨 박명수의 말마따나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진짜 늦은 것’일 만큼 빠르고 급격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김형준

김형준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과 <톱기어> 한국판, 남성지 <지큐코리아>에서 다년간 자동차 글을 써왔다. 글로벌 자동차 잡지 <모터 트렌드>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한층 흥미롭고 심도 깊은 자동차 문화 탐구를 위해 자유 항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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