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동차 그릴 디자인,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꿈꾸다
[송인호의 디자인 돋보기] 자동차에서 그릴은 차체에 공기의 유입을 위해 뚫려있는 공간의 덮개 역할을 한다. 이런 그릴은 차의 여러 군데에 존재하는데 전면부 상단의 라디에이터 그릴과 범퍼 하단의 그릴은 라디에이터와 엔진을 보호하고 엔진의 열을 식히는 데 쓰이고 하단 가장자리의 그릴은 브레이크의 열을 식히는 데 쓰인다. 이 외에도 윈드쉴드, 즉 전면 유리창과 후드를 구분하는 카울 그릴은 실내 공조를 위해 존재하고 있고 리어엔진 차량에는 후면 데크리드에 그릴이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그릴은 차의 기능을 위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디자인 관점에서는 그 본래의 기능을 넘어서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차량의 전면부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지며 장식적 역할을 하고 있는데 대부분의 자동차회사에서 그릴을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상징하는 필수 요소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유명 자동차회사들은 고유의 그릴을 빼고서는 설명하기 힘들 정도다. 파사드 그릴이 없는 롤스로이스, 말발굽모양의 그릴이 없는 부가티, 방패모양의 그릴이 없는 알파로메오 그리고 키드니 그릴이 없는 BMW는 쉽게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들 그릴은 처음부터 각 자동차회사의 아이덴티티를 구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능적인 요구에 의해 등장한 부품들에 불과했을 그릴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전통과 철학을 자연스레 담아내게 된다. 또 시각적인 우수성 뿐 아니라 그 성능에서 명성을 얻게 되면서 그들을 다른 자동차회사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힘을 얻게 됐다. 소비자들로부터 부여 받은 일종의 역사와 명예의 상징인 것이다. 후발 주자들은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케팅의 차원에서 전적으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간다고 볼 수 있는데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새로움을 창출해 내고 소비자들로부터 명성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실제로 렉서스의 경우 프리미엄 시장으로의 진입을 위해 1983년 코드네임 ‘F1(Flagship One)’을 시작으로 1989년 LS400을 런칭했는데 이를 위해서 F1 팀의 디자이너들은 캘리포니아의 라구나비치에 방을 렌트해서 미국 상류층의 삶을 직접 경험해 보고 그들이 원하는 럭셔리 차량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연구했다는 사실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LS400와 ES250은 프리미엄 브랜드로서 새로움이 없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품질과 고객서비스가 호평을 받으며 미국시장에서 프리미엄브랜드로 연착륙을 하게 된다.
2003년에는 ‘엘피네스(L-finesse)’라는 철학을 발표하게 되는데 여타 브랜드와 차별화 된 일본 특유의 정서가 담긴 키워드와 함께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도를 시작하였다. ‘흥미로운 우아함(Intriguing Elegance), 날카로운 간결함(Incisive Simplicity), 지속적인 기대감(Seamless Anticipation)’으로 대변되는 렉서스의 디자인 철학은 2004년과 2005년 연이어 발표된 LF-C. LF-A 즉, LF(L-Finesse)시리즈의 콘셉트 카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 이런 기조는 2000년대에 등장한 양산차에 속속들이 녹아들었고 날카로우면서도 간결한 디자인 바탕으로 한 상품성과 우수한 고객서비스를 무기로 프리미엄 시장에서 제대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11년, 2012년 연이어 등장한 새로운 전면 디자인과 특히 스핀들 그릴은 사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할 정도로 다소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디자인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통적으로 자동차 디자인에서 금기 시 되어 온 예각을 적극 활용한 형태와 삼각형을 위주로 한 모서리의 날카로움은 비록 ‘엘피네스’가 지향하는 바가 일본 특유의 예리함 또는 날카로움이라 하더라도 다소 자극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들이 지향했던 우아함과 간결함과도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기에 충분했다. 우스갯소리로 모 유명 스포츠 브랜드와 콜라보레이션을 하기로 했나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시각적인 임팩트가 이런 비난을 능가했을까? 스핀들 그릴로 이름 지어진 렉서스의 새로운 디자인 언어는 얼마지 않아 소비자들에게 더 이상 눈살을 찌푸릴만한 낯선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는 사실은 ‘엘피네스’ 철학 안에서 새롭게 표현되는 새로운 시각적 가치로 승화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렉서스의 사례를 보면 2003년부터 꾸준히 진행되어온 ‘엘피네스’의 가치를 구현하려는 노력이 15년이 지난 지금 소비자들에게는 깊이 있는 프리미엄의 가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릴 하나로 그 디자인의 가치를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겠지만 전통적으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지배하던 그릴은 보이는 것 그 이상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기 때문이다.
국내 브랜드들도 역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있는데 최근 새롭게 펼쳐 보이고 있는 디자인 철학과 그에 따른 디자인 언어에 소비자들의 반응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가 굳게 믿고 있는 것은 국내 자동차 브랜드에 속해있는 디자이너들의 우수한 역량이다. 다만 각자 디자이너의 마음속에 존재 하고 있을 그들의 꿈과 자신감이 발현되는 환경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길 기대한다. 디자이너 스스로의 책임감도 함께 말이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송인호
송인호 칼럼니스트 : 현대·기아차와 미국 GM에서 18년간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대표작으로는 오피러스, K7을 비롯 쉐보레 볼트, 캐딜락 ELR 등이 있다. 국민대학교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의 주임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