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벡터 W8, 미국산 슈퍼카의 시작과 끝 (1)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미국산 슈퍼카라는 게 있었던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래로, 미국은 세계를 주도했다. 세계 최고의 공업기술력과 생산 기술을 가진 나라에서 쏟아져 나온 제품은 지구의 삶 자체를 바꾸어 놓았으며, 자동차 또한 그 중 하나였다.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여전히 빅3가 만드는 차는 한 해 이천만대가 넘게 팔리고, 상용차나 특수차량에서는 아직도 강건한 미국차의 입지를 확인할 수 있다. 자동차 세계의 정점을 모두 찍어본 미국 자동차 산업이 아직 한 번도 도달해 보지 못한 영역은, 딱 하나 뿐이다. 슈퍼카.
미국산 슈퍼카라 부를만한 차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르망 24시를 석권했던 포드 GT40나, 성능만 놓고 보면 슈퍼카의 영역에 들어선 쉐보레 콜벳 같은 차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들을 시판 슈퍼카라 넙죽 인정하기에는 저항감이 생긴다. GT40는 도로용으로 판매되지 않은 레이스 전용 머신이었으며, 콜벳은 1년에 3만대씩 팔리는 ‘대중 브랜드’ 쉐보레의 차다. 레이스와 일반도로 주행만 염두에 둔 초고성능차, 그 섀시와 파워트레인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내는 ‘미국회사’는 현재로서는 멸종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투어링카나 프로토타입 레이스 같은 슈퍼카의 토양을 배척하는 환경, 유럽지향의 상류 소비문화, 빅3에만 집중된 산업환경 등, 단정하기 어려운 수많은 이유가 떠오른다. 당연하게도, 이런 상황이 부당하다고 느낀 미국인 중 누군가는 직접 미국제 슈퍼카를 만든 적도 있다. 이미 40여년 전에.

◆ 꿈만 꾸지 않았던 아이
2차 대전이 끝나던 해였던 1945년, 제럴드 와이거 (Jerald Wiegert)가 태어난다. 자동차 세계의 중심이었던 미시건 디어본에서 자란 아이가 자동차에 관심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선천적으로 나쁜 시력 때문에 전투기 파일럿을 포기한 뒤로, 자동차는 어린 와이거의 유일한 인생목표가 된다. 차 좋아하는 꼬마라면 한번쯤은 품었을 꿈, 세계 최고의 슈퍼카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위해 와이거는 착실히 지식을 쌓았다. 노드롭 (스텔스폭격기 B-2와 F-5를 만든 그 회사)이 직접 운영하는 공과대학교를 나온 뒤, 명문 아트센터 컬리지오브디자인( ArtCenter College Of Design)에서 산업디자인 석사까지 마친 그는 1971년, 비히클 디자인 포스 (Vehicle Design Force) 라는 이름의 회사를 차린다. 빅3의 디자인 컨설팅이 주력분야였지만, 그의 마음이 어디를 향했을지는 뻔한 일. 창업 후 1년이 지나지 않은 1972년, 오리지널 모델인 더 벡터(The Vector) 가 LA 오토쇼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당시 와이거의 능력으로 실체화 시킬 수 있었던 것은 스케일 다운 모형이 전부. 로터리 엔진(?) 탑재를 목표로 한 미국제 슈퍼카의 컨셉은 잠깐의 관심만 끌고 끝났다. 당장이라도 도로를 달릴 수 있는 실차 없이는 설득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실감한 와이거는 진짜 차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돈 없이 차를 만드는 과정이 순탄할 리는 없었다. 핵심 인력들이 회사를 떠나는 와중에도 그는 외주일감을 가져오며 버틴다. 가와사키의 의뢰를 받아 참여한 새로운 탈 것, ‘제트스키’는 큰 성공을 거두지만, 그는 그저 컨설턴트였을 뿐, 돈과 명성은 온전히 의뢰자의 몫으로 돌아갔다. 여유가 될 때마다 차를 붙잡고 씨름하기를 4년, 드디어 1:1 스케일의 프로토타입이 모습을 드러낸다. 분명 슈퍼카의 모습을 갖추었지만, 이탈리아제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차에 시선이 몰린다. 유류파동과 경기 침체를 겪으며 첫 프토로타입이 완성되기까지 다시 2년, 와이거의 이니셜 W를 딴 2번째 차 ‘W2’가 완성되는 것은, 작업을 시작한지 7년이나 지난 뒤였다.

◆ 항공기술과 V8 트윈터보
미국식 슈퍼카를 표방했던 만큼, 벡터는 철저하게 미국의 기술과 부품에 기반을 두었다. 와이거는 익숙한 항공기의 제직 방식을 신차에 대거 도입한다. 벌집구조의 알루미늄 플로어팬에 결합된 차체 구조물은 5천개가 넘는 리벳으로 고정시킨 후 다시 항공용 접착제로 마무리했다. 차체를 구성하는 외피는 모두 카본파이어와 케블라로 만들었다. DOT 충돌 테스트도 문제없이 통과할 정도였다.

엔진은 GM의 5.7리터 스몰블럭을 기반으로 풀 커스텀화 된 Rodeck사의 레이싱용 V8. 이것을 운전석 뒤에 가로 배치했다. 피스톤부터 크랭크 샤프트까지 모조리 단조 파트로 강화된 6리터짜리 OHV엔진은 이미 그 자체로 500마력 가까운 힘을 냈지만, 목표로 한 최고속 230mph(시속 370km)를 내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와이거는 보쉬의 최신 전자 인젝션 제어시스템과 뱅크당 한 개씩 총 2개의 터보를 추가한 V8 트윈터보 엔진을 만든다. 부스트를 1.2bar까지 올리면 순간 1400마력까지도 발휘할 수 있는 괴물이었지만, 실제 출력은 0.4bar 625마력에 묶어 있었다. 출력을 낮춘 것은 변속기 때문이었다.
엔진을 가로배치한 벡터는 구조상 앞바퀴 굴림 차량의 변속기를 활용해야 했지만 90kg.m나 되는 무식한 토크를 버텨낼 물건은 하나밖에 없었다. 올즈모빌 토로나도스 (Oldsmobile Toronados). V8이지만 특이하게도 앞바퀴를 굴린 차를 위해 만들었던 터보 하이드라매틱(Turbo-Hydramatic) 자동 변속기가 벡터에 탑재된다. 1960년대에 나온 변속기였던 탓에 단수는 고작 3단에 머물렀지만, 단수를 1단에 고정한 채 이 미친 토크를 퍼부으면 차는 0-100km/h 까지 4.2초에 도달할 수 있었다. 현대적인 독립식 서스펜션 대신, 구식의 변형 리지드 타입 서스펜션, 드디옹 액슬을 쓴 것도 결국엔 토크 대응 설계였다. Alcon사의 알루미늄 4 피스톤 캘리퍼가 장착된 13 인치 디스크를 감싼 것은 초고속에서도 버틸 수 있는 특주 미쉐린 XGT Plus 타이어 (255/45ZR16 앞, 315/40ZR16 뒤). 350km/h를 넘어 버텨줄 타이어를 만들겠다는 미국회사가 없어 사용하게 된 몇 안되는 외국산 부품이었다.

일반적인 슈퍼카의 제작공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벡터는 유럽제 슈퍼카라면 남게 되는 레이스카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였다. 파워스티어링이나 ABS는 빠져 있었지만, 에어컨과 전동식 파워시트는 달려 있었다. 전투기 조종사를 동경했던 와이거의 취향을 고스란히 반영한 인테리어에서는 그의 전투기에 대한 집착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 19년만의 발매
1980년이 되고 생산 준비까지 마쳤지만, 벡터의 슈퍼카가 주인을 찾기까지는 또 10여년의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와이거가 만성적인 재정문제에서 벗어나는 것은 훗날의 기업공개 이후지만, 그전까지 회사를 꾸려나간 방법은 벡터의 계기판만큼이나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의 방식은 ‘상표권 분쟁’이였다. Vector라는 이름을 별 생각 없이 사용한 회사들은 모조리 거액의 소송 전에 끌려들어가 배상금을 내야 했으며, 특히 타이어나 담배회사 같은 대기업은 그의 집중 공격목표가 되었다.

최초이자 유일했던 프로토타입은 16만km가 넘는 거리를 달리며 주행과 관련된 문제를 수정했으며, 그동안 공력특성에 대한 대대적인 수정도 들어간다. 공기저항이 0.32까지 낮아지며 큰 폭의 성능향상을 이루어 낸 최종 모델은 W8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1989년, 벡터 에어로모티브 (Vector Aeromotive)가 나스닥에 상장되며, 순수 미국제 슈퍼카 벡터 W8이 마침내 시판된다. 1991년, W8의 첫 고객은 테니스 스타였던 앙드레 아가시. 45만5천 달러나 되는 거금을 일시에 내민 그는 당장에 차를 내놓으라며 와이거를 들볶았다. 전시만 할 것을 전제로 건넨 미완성차를 결국 몰고 나간 아가시는 차를 부셔먹은 뒤 환불을 요구한다. 시끄러워 질 것을 두려워한 회사는 순순히 돈을 돌려준다.
W8의 첫 고객은 진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앞으로 일어날 일의 전조(前兆)이기도 했다.

(2부에 계속됩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변성용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객원기자로 일했다. 파워트레인과 전장, 애프터마켓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업무를 수행하며 자동차를 보는 시각을 넓혔다. 현재 글로벌 자동차 전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