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네시스 EQ900 vs ‘라이프’ 조승우
[강희수·정덕현의 스타car톡] 우리네 현실에서 자동차는 그 사람의 위치를 나타내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사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으면 모두 엄청난 슈퍼카 정도는 몰 것이라 생각하지만, 재벌가의 일원이 아닌 월급쟁이 사장이라면 제 아무리 돈이 많아도 탈 수 있는 차의 상한선이 암묵적으로 정해져 있다. <비밀의 숲>을 쓴 이수연 작가의 신작드라마 <라이프>에서 상국대학병원 신임 사장으로 온 구승효(조승우)가 타는 제네시스 EQ900이 그렇다. <라이프>와 거기 등장하는 EQ900에 대해 자동차 전문기자 강희수와 대중문화 칼럼니스트인 정덕현이 이야기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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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현의 이 드라마는 : <라이프>는 의학드라마지만 우리가 봐왔던 기존 의학드라마와는 다르다. 병원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곳이지만 어느새 자본주의 시스템이 들어와 있다. 따라서 생명과 자본은 어느 지점에서는 대립되는 부분이 생겨난다. 병원의 진짜 본분을 지키려는 자와 병원도 기업과 다를 바 없다며 바꾸려는 자의 대결을 통해, 자본주의가 깃든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해부하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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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수(이하 강) : “또 의학드라마야?“ 한 때 이런 의구는 품었다. 하지만 작가가 이수연 씨라는 얘기에 얼른 의구심을 접었다. 이제 겨우 초반부를 벗어나고 있는 JTBC 월화드라마 <라이프>가 안방극장에 초대형 충격파를 퍼트리고 있다. 데뷔작부터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이수연 작가가 언급 된 이상, 전작인 <비밀의 숲>을 먼저 돌이키지 않을 수 없다. tvN에서 방송 돼 최고 시청률 6.6%를 기록했던 <비밀의 숲>은 시청률 수치 그 이상의 의미를 방송가에 남겼다. 치밀하면서도 스케일이 크고 사회성 짙은 작품을 써내는 작가 이수연의 이름은 깊고도 강렬하게 새겨졌다. 두 드라마에서 연속으로 주연을 맡은 배우 조승우도 든든한 주춧돌이다. 믿고 보는 배우라는 수식어가 결코 과하지 않은 대표적인 배우가 바로 조승우다. <비밀의 숲>에서는 거대한 조직의 힘에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황시목 검사역을 맡았고 <라이프>에서는 이윤 극대화를 위해 종합병원에 구조조정의 칼날을 들이대는 CEO로 나온다.

정덕현(이하 정) : <라이프>는 말한 대로 촘촘한 대본은 기본이고, 연출도 예사롭지 않다. <라이프>에서 처음 의사와 사장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예진우(이동욱) 응급의료센터 전문의와 구승효(조승우) 총괄사장이 마주치는 장면이 그렇다. 마치 아버지처럼 따랐던 원장의 갑작스런 죽음을 마주하고 망연자실한 채 예진우는 도로를 건너고, 마침 그 때 구승효가 탄 차가 끽 소리를 내며 급정거를 한다. 예진우가 놀라서 슬쩍 피하며 차 안에 누가 타고 있는가를 살피고, 그 차에서 잠시 후 구승효가 다부진 모습으로 내린다. 제네시스 EQ900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인데, 향후 구승효가 나아가려는 길을 만만찮게 예진우가 가로막을 거라는 걸 그 한 장면이 암시한다. 굉장히 상징적이라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물론 그 때 현대자동차가 차량 지원을 했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강 : <비밀의 숲>에 이어 <라이프>도 모두 현대자동차그룹이 제작지원을 했다. <비밀의 숲>에서는 현대자동차의 준대형 세단 ‘그랜저’가 등장해 조승우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했다. <라이프>에서는 CEO로 ‘성장’한 만큼 차도 ‘EQ900’으로 업그레이드 됐다.
정 :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현대자동차 라인업이 보이는데, 예진우는 신형 싼타페를 끌고 부원장은 제네시스 G80을 끈다. 상당히 그 사람의 연령대나 직급 등을 염두에 둔 차량 선정으로 보인다. 부원장 집에서 원장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예진우가 그 집 앞에 있다가 부원장이 G80을 타고 가는 걸 뒤쫓는 장면이 나온다. 자동차로만 봐도 무언가 오래된 권력의 뒤를 캐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나. 그만큼 작품의 작은 소재들까지 그냥 쓰인 게 아니라는 거다.

강 : 이제 갓 초반부를 벗어나려 하고 있지만 <라이프>에서는 두 가지 굵직한 상징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상징은 ‘욕망’이다. 2000병상 규모의 상국대학병원을 인수한 화정그룹은 탐욕의 끝을 알 수 없는 재벌의 전형이다. 화정그룹 조남형 회장의 집무실은 잠실 롯데월드타워에 있고, 사장단 회의가 열리거나 구승효 상국대학병원 사장이 회장 보고를 할 때는 어김없이 카메라가 롯데월드타워의 거대한 실루엣을 훑는다. 롯데월드타워는 그 까마득한 높이와 독특한 디자인 탓에 다양한 상징을 쏟아낸다. 긍정적으론 번영과 희망을, 부정적으론 권위와 욕망을 떠올리게 한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사우론의 눈을 닮은 롯데월드타워는 적어도 드라마 <라이프>에서는 후자의 이미지에 가깝다. 욕망의 화신이다.
정 : 상징에는 자동차도 빼놓을 수 없다.

강 : 그렇다. 또 하나의 상징적 사물이 ‘EQ900’이다. ‘EQ900’은 제네시스 브랜드에서 만들어 내는 대형 럭셔리 세단이다. 국내 제조사들이 생산해 내는 자동차 중에는 가장 상위에 있다. 현대자동차가 ‘제네시스’라는 럭셔리 브랜드를 독립시키기 전에는 ‘에쿠스’로 불렸던 그 차다. 럭셔리 브랜드의 최상위 플래그십답게 5미터가 넘는 차체는 웅장하기 그지없다. ‘EQ900’ 중에서도 최상위 트림인 ‘5.0 가솔린’ 모델은 8기통 5000cc 자연흡기 방식의 엔진을 달고 있다. 풀타임 사륜구동에 최대출력 425마력, 최대토크 53.0kg.m을 낸다. 덩치가 큰 만큼 기름도 엄청 먹는데, 휘발유 1리터로 갈 수 있는 거리가 6.1km에 불과하다.
정 : 그런데 궁금하다. 과연 총괄사장 정도 되는 위치에 있다면 외제차 정도는 탈 것처럼 여겨지는데, 굳이 현대자동차 제네시스 그것도 EQ900을 탄다는 것이 그냥 설정된 것 같지가 않다.

강 : 그렇다. ‘EQ900’은 제네시스 브랜드의 플래그십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월급쟁이가 누릴 수 있는 최고 대우이자 한계라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월급쟁이가 재벌이 될 수는 없는 것처럼, 아무리 명석한 판단력의 소유자라 하더라도 누군가가 주는 월급을 받는 입장이라면 ‘EQ900’ 이상을 탈 수 없는 게 우리나라 사회구조다. <라이프> 1, 2회에서 방영 된 화정그룹 사장단 회의를 떠올려 보자. 조남형 회장은 구승효 사장에게 매머드 의료 타운을 짓기 위한 송탄부지 매입을 지시한다. 현직 환경부 장관의 아버지이자 서산개척단의 아픔을 간직한 소유주는 그 땅을 목숨처럼 소중이 여겨 팔 생각이 전혀 없다. 구승효 사장에게 난제를 떠맡긴 조남형 회장과 사장단 회의장의 분위기는 “그래, 네가 지금까지는 잘 해왔지? 어디 이 일도 해내는지 보자”는 심산이다. 잘 해결하면 기업에 좋은 것이고, 실패했을 경우에는 가차 없이 구승효의 능력을 평가절하 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한 가지를 해결하고 나면 더 큰 난제가 주어질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정 : 그렇게 보니 EQ900 설정이 대단히 계산되어 있다고 보인다. <라이프>에서 구승효 사장은 굉장히 독특한 인물이다. 상국대학병원을 갖고 있는 화정그룹의 이른바 ‘장학생’이다.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어 그룹이 키워놓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월급사장으로서 자기 위치에서 냉철한 판단을 내리고 또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보이지만, 땅 소유자를 만나 하는 행동들을 보면 의외로 인간적인 모습도 보인다. 우리가 생각하는 태생부터 사장인 그런 인물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물론 신분상승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겠지만, 태생적 한계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는 그런 눈치다. 그래서 드라마는 예진우와 구승효의 대결구도를 그리지만 그것이 선과 악의 대결처럼 다뤄지지는 않는다. 이수현 작가는 이를 항원 항체 반응이라고 얘기했는데 그게 흥미롭다. 구승효라는 자본과 경영을 표상하는 항원이 병원에 들어오게 되면서 그간 조용히 살아가던 예진우가 항체 반응을 일으킨다는 이야기다. 선과 악이 아니라 사로 다른 생각과 욕망이 부딪치는 이야기를 <라이프>는 다루고 있다. 구승효의 EQ900은 그래서 자신의 최고점이지만 더 이상 오를 수 없이 지켜야만 하는 최후의 보루 같은 느낌을 주는 면이 있다.

강 : 회장과 사장단 회의에서는 “네가 아무리 뛰어난 능력자라도 내가 주는 월급을 받아먹고 사는 욕망의 덩어리 일 뿐이야”라는 비아냥거림이 뒤에 있다. ‘EQ900’을 타는 사장은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롤스로이스를 탈 수는 없다. 이런 한계는 재벌 회장도 마찬가지다. 사우론 타워의 기세가 제아무리 높아도 결국은 하늘 아래 바벨탑일 뿐이다. ‘EQ900’이 제 아무리 럭셔리를 뽐낸다 한들, 한낱 돈 많은 머슴이 타는 차에 불과한 것을. 비록 악역을 맡았지만 내면엔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는 입체적 인물 조승우, 그가 마지막에 깨닫게 될 이치도 결국 이 범주이지 않을까?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 x 자동차전문기자 강희수
강희수 칼럼니스트 : <일간스포츠>에서 프로야구 기자로 출발해
정덕현 칼럼니스트 : 대중문화 속에 담겨진 현실을 분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백상예술대상 심사위원이고, 현재 SBS 미디어 비평 <열린TV>에서 ‘정덕현의 TV뒤집기’, KBS <연예가중계> ‘심야식담’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강희수·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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