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서를 제출하고 여행을 떠났다. 믿음직한 친구와 지프 올 뉴 랭글러와 함께”



[김형준·나윤석의 듀얼 콕핏] #1 나왔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퇴사였다. 마지막 직장인 <모터 트렌드>에서는 11년 동안 머물렀다. 그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11년 동안이 아니라 ‘머물러서’.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사직서를 내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자동차 기자로, 잡지 편집장으로 누려온 특혜(?)를 내려놓고 박차고 나오는 건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 혜택이었기 때문이다. 출근하지 않는 첫째 날, 거실 소파에 앉은 내 자신이 어색했다. 시계를 보며 그맘때쯤 쳐내고 있었을 회사 업무를 떠올렸다. 20년 가까이 반복해온 일상의 루틴이 하루아침에 떨쳐질 리 만무했다. 그런데 그 순간, 묵직한 연기라도 가득 찬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퇴사 소식에 인생선배가 건네던 조언이 떠올랐다. “혼자 여행을 다녀와. 잠깐이든, 길게든.”



떠나기로 했다. 20년 가까이 쌓인 묵은 떼를 벗겨내기 위해서. 박박 떼를 벗겨낸 뒤 새 옷을 걸쳐 입기 위해서도. 특별한 목적지도 없는 여행이었다. 하지만 생전 해본 적 없는 여행이고 싶진 않았다.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거라면 십 수년 익숙해진 일이었다. 혼자 하는 여행도 아니었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익숙한 여행을 위해 믿을 만한 동행을 찾았다. 십 수년 알아왔고 나에 관해서라면 고맙게도 무한대의 믿음을 내비쳐주는 인물. 업계 동료이자 인생 선배이며 자동차 여행이 난관에 부딪혔을 때 해결할 능력도 있는 사람. 자동차 칼럼니스트 나윤석이었다.

여정을 함께할 자동차도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지프가 키를 건네주었다. 지난 7월 출시한 올 뉴 랭글러 런치 에디션이었다. 11년 만에 풀 체인지한 SUV의 아이콘. 심지어 깍두기 같은 스터드의 올 터레인 타이어까지 끼운 루비콘 모델. 어떤 여행이 될지 불 보듯 훤했다. 도로의 경계를 두지 않고 달리는, 궤도를 벗어난(Off the road) 전천후 여행의 시작이었다. 짐작보다 훨씬 편안한 여정이었고.



#2 랭글러는 세대를 막론하고 오프로드에서 가장 편안한 자동차였다. 신뢰의 이야기인 동시에 주행품질의 이야기다. 적확하겐 ‘오프로드에서만’ 편안한 차였다. 그곳까지 오가는 길은 운전자 자신의 대단한 체력과 (랭글러를 향한)맹목적인 사랑을 요구했다. 그런데 새로운 랭글러는 달랐다. 운전대를 돌려보는 순간 강하게 ‘촉’이 왔다. 마침내 일상적 승용차의 영역에 들어왔음을. 과장이 아니다. 스티어링의 파워 어시스트가 자연스럽고 매끈하게 작동한다. 운전대가 돌아가는 느낌뿐 아니라 차가 방향을 바꾸는 태도도 부드럽다. ‘반 깍두기’ 타이어를 신고 있는데도 움직임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심지어 승차감조차도. 사다리꼴 프레임 위에 얹은 강철 차체를 뒤흔드는 진동이 자취 없다. 소음까지 깔끔하게 정돈돼 있어 운전대는 물론 바닥이나 기어박스 주위 격벽이 차분하기 그지없다.

랭글러의 ‘일신(一新)’한 포장도로 몸가짐은 속력을 높여보면 한층 도드라진다. 맞바람이 차체를 때리는 소리, 차체의 찌걱거리는 잡소리는 잦아들었고 타이어가 노면을 긁으며 나는 불쾌한 소음도 알맞게 걸러진 채로만 들려온다. 고속도로 위에서 동승자와 목청 높여 대화할 일은 사라졌단 이야기다. 2속 트랜스퍼 케이스를 갖춘 파트타임 4WD 구동계는 또 어떻고. 신형의 4WD 시스템은 2L-4H-4L의 기존 3가지 구동방식에 4H 오토를 추가했다. 일반적인 풀타임 4WD처럼 앞뒤 바퀴에 꾸준히 엔진 힘을 전하는 기능이다. 4H 오토는 고속도로는 물론 시내에서도 사용 가능하다. 기존 랭글러의 2H 모드로 살 떨리는 고속도로 주행 경험을 해봤거나 시내에서 4H 모드인 채로 유턴하다가 톱니바퀴 부러지는 듯한 소음을 들어본 적 있는 사람은 이 기능의 추가가 더없이 반가울 터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새로운 가솔린 파워트레인인데, 음, 신형 랭글러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 같은 장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신 2.0L GME-T5 가솔린 터보 엔진으로 최고출력 272마력과 최대토크 40.8kg·m의 성능으로 기존 3.6L V6 펜타스타 엔진 자리를 대신한다. 중요한 점은 파워의 숫자가 아니라 운전자가 느끼는 힘인데, 저회전부터 터보 지체현상 없이 자연스럽고 듬직한 힘을 꾸준하게 내 가속이 무척 손쉽다. 오프로드 주행에 집중해 파워를 저속에 집중시킨 엔진인가 싶지만 웬걸, 4000rpm 이상 중고속까지도 힘이 뚜렷하다. 비결은 48V 전기 시스템과 연결된 스타트 제너레이터 모터로, 이 장치가 터빈이 제 기능을 하기 전까지의 저회전 때 엔진 힘을 보태는 역할을 한다. 저회전 토크 어시스트와 터보차저에 의한 중속 이상에서의 출력 증가가 이질감 없이 매끈하게 이어진다는 점도 흥미롭다. 심지어 이 엔진은, 본격적인 오프로드 여정에서도 저회전대 출력의 이점을 톡톡히 발휘했다.

신형 랭글러의 달라진 면면은 주행성능에만 집중해 있지 않다. 겉모습에선 LED 헤드램프와 테일램프의 현대적인 감각이 도드라지고, 인테리어는 승용차에 가까운 고급 SUV 못지않은 감성품질을 갖추고 있다. 예컨대 두툼한 기어레버를 다루는 느낌은 여느 승용차와 다르지 않다. 프레임이 거의 없는 룸미러, 7인치 TFT 디스플레이를 담은 계기 클러스터, 애플 카플레이와 안드로이드 오토 연결이 가능한 8인치 터치스크린 인포테인먼트(U커넥트) 등 현대적인 기능도 빠지지 않는다. 프레임리스 룸미러는 클래식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동시에 더 나은 전방 운전시야를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이다.



#3 결국 우리는 박차고 나왔다. 나윤석 역시 수년 전 수입 프리미엄 브랜드의 매니저라는 안락한 자리에서 내려와 칼럼니스트로 안착했으니 나와 다를 바 없이 박차고 나온 자였다. 올 뉴 랭글러라면 변신 자체가 화제일 수밖에 없는, 자동차 세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아이콘. 그 역시 11년 만에 풀 모델 체인지를 겪었으니 그와 나와는 또 다른 맥락에서 안전지대를 박차고 나온 주인공이라 말할 수 있겠고. 박차고 나온 자들의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김형준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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