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준·나윤석의 듀얼 콕핏] #1 난 몇 해 전 인생 후반전을 시작했다. 수입차 업계에서 보낸 20여 년을 마무리하고 이번엔 반대 입장인 자동차 언론계에서 칼럼니스트로, 그리고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친구이자 취미인 자동차와 함께하는 인생이란 점은 여전하기 때문에 전혀 다른 업종으로 전환하는 사람들보단 훨씬 안전하고 행복한 후반전인 셈이다. 그래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당시 나는 일주일 동안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생각의 흐름대로, 발길 닿는 대로 움직이는 여행을 떠났다.
여행은 근본적인 질문과 그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피곤한 몸을 쉬는 휴가와 말라버린 마음의 셈을 채우는 관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따라서 내게로 떠나는 여행은 외롭다. 핵심에 도달하지 못할지 몰라 불안하기도 하다. 그때 도움을 주었던 이가 당시 <모터 트렌드> 편집장이었던 김형준이다. 그는 내게 소울 프렌드 같은 사람이다. 오랜 시간 알고 지내면서 자주 만난 것은 아니지만 항상 거기에 있을 거란 생각만으로도 내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얼마 전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며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동행했다. 그 여행이 얼마나 외롭고 불안한지 난 이미 겪었기 때문이다. 그가 필요로 한다면 난 옆에서 직접 함께할 수 있다. 그에겐 최대한 자유로운 여행을 선물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를 구속하지 않는 믿음직한 차가 필요했다. 원하는 곳 어디든, 아니 굳이 원하지 않았더라도 만나게 되는 어떤 곳에서도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전천후 자동차.

#2 여행에 어울리는 차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환경 적응력이 뛰어난 정통 SUV. 요즘은 SUV처럼 생긴 차는 많지만 오프로드를 제대로 달릴 수 있는 진짜 SUV는 별로 없다. 후보가 확 줄었다. 너무 크거나 고급스러워도 곤란했다. 거추장스럽거나 차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이미 여행은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흙탕물을 뒤집어쓴 게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는 진짜 SUV. 단 하나였다. 지프 랭글러였다.
일찍이 랭글러는 비포장길에 들어가면 훨씬 편해지는 오프로드 머신이었다. 그런데 이번 신형은 일반도로에서 승차감과 진동·소음 처리가 몰라보게 좋아졌다. 온로드 성능 확보를 위해 오프로드 성능에 타협은 없었는지 궁금했다. 물론 라이브 액슬 일체형 차축 구조와 보디 온 프레임 구조 등 기존 공식을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에 큰 변화는 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전 세대보다 휠베이스가 5cm나 늘어나는 등 길어진 차체가 오프로드에서 거추장스럽진 않을까 내심 걱정되기도 했다.

기우였다. 우리가 탄 모델은 오프로드 성능이 강화된 루비콘 모델. 최저지상고도 사하라 모델보다 2cm 높은 27.5cm이고 접근각과 이탈각 모두 한참 여유 있다. 게다가 서스펜션에는 유압식 리바운드 스톱이 달려 있어 서스펜션이 최대한 늘어나도 거친 느낌이 없다. 오프로드에서 접지력과 승차감을 한방에 잡아낸 셈이다. 루비콘에만 있는 앞 차축 스웨이바 디커플링 장치를 사용하면 대각선 스트로크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 도랑이나 돌무더기가 쌓인 코스를 대각선으로 통과하기가 한결 수월해지는 것이다. 여기에 느리게 움직이는 험로주행 승차감까지 부드럽고 여유로워지는, 부수적이지만 매우 반가운 효과도 이전보다 크다.
올 뉴 랭글러는 무른 노면이나 비포장 급경사에서도 좀처럼 바퀴가 헛돌지 않았다. 그만큼 접지력이 좋다는 의미. 전자제어식 차동 제한장치는 거의 작동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다. 디지털 클리노미터가 경사도 25°를 가리키는 가파른 비포장 코스에 도전할 때도 기어비 4:1의 초저속 4L 로(low) 기어를 선택하고 센터와 리어 디퍼렌셜을 잠근 게 호들갑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천연덕스럽게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신형은 파트타임 4WD가 적용돼 있음에도 특이하게 4H 오토와 4H 파트타임 모드가 따로 존재한다. 4WD 시스템을 보다 편안하게 쓸 수 있게 배려했단 의미겠다. 오프로드 장비로서의 성격이 너무 강해 대중성에 다소 제약이 있었던 이전 세대의 보이지 않는 벽도 다소나마 낮아졌다.

#3 내려놓지 않으면 새로운 것은 잡을 수 없다. 하지만 지금 갖고 있는 걸 내려놓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것이 인생 2라운드를 시작하는 결심의 시기라면 더욱 그렇고. 어쩔 수 없는 ‘차쟁이’들인 그와 나는 인생 후반전을 기념하는 여행의 파트너로 결국 차를 선택했다. 신형 랭글러의 새로운 면모를 찾고 경험하는 과정 자체로도 이 여행은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심지어 랭글러라는 차는 이번 여행에서 우리에게 생각지도 못한 인생의 지혜까지 던져주었다. 한 남자의 ‘인생 후반전을 찾아가는 여행’에 더할 나위 없는 파트너였단 얘기다.
나윤석 자동차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