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킷과 정반대인 험로 주행의 재미... 그런데 탈 곳이 없네

[김형준의 숫자 깨먹기] 5km/h. #1 산정상에서 내려오는 중이었다. 파묻힌 돌무더기가 보드라운 흙과 잡초가 뒤섞인 땅 위로 머리를 드러낸 가파른 비탈길이었다. 맞다. 일반적인 승용차가 다닐 만한 포장도로는 아니었다. 4X4 트럭이 산등성이 중간중간의 밭에 작업하러 오가는 용도로나 쓰는, 모양만 길일 뿐인 길이었다. 나는 범용 오프로드 타이어를 신은 SUV로 하산하는 길이었다. 저속(4WD Low) 기어를 갖췄고 앞뒤와 가운데 디퍼렌셜 잠금 기능도 있는 오프로더이기에 오를 수 있었던 길이기도 했다.

내려오는 길은 내리막 속도 제어장치(Hill Decent Control, HDC)에 의지하는 중이었다. 저속 기어에 HDC까지 더한 오프로더는 더도 덜도 없이 설정한 속도(3km/h)에 맞춰 비탈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꾸물꾸물. 어기적어기적. 그 품새가 하도 답답해 HDC의 제어속도를 5km/h로 ‘살짝’ 끌어올린 참이었다. ‘스으윽!’ 차가 갑자기 아래로 돌진했다. 고삐 풀린 황소 같다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 기세였다. 느닷없는 돌진에 놀란 난 황급히 브레이크 페달을 꾹 밟았다. ‘스으으윽!’ 범용 오프로드 타이어가 좀 전보다 더 위협적인 기세로 미끄러졌다. 다시 HDC 설정 속도를 5km/h에서 4km/h로 낮췄다. 겨우 시속 1km였다. 하지만 차는 그제야 거짓말처럼 진정됐고, 비탈길을 다시 꾸물꾸물 안정적으로 ‘걸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2 자동차로 오프로드를 ‘달려’보면 포장도로를 달릴 때와는 다른 많은 것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 속도다. TV CF에 종종 나오는, 차 뒤로 폭풍우 같은 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장면은 제대로 된 험로에서 연출하기 어렵다. 실상 그 속도는 달린다기보다 걷는 것에 가까운데, 그러지 않으면 무수히 많은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오프로드에 첫발을 디디면 누구나 긴장해 뻣뻣하게 차를 다루기 십상인데, 더 큰 문제는 험로를 달리는 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다음부터다. ‘어라? 해볼 만하네’ 하는 자신감이 똬리를 틀고 나면 자연스럽게 주행속도가 올라가는데, 오프로드에선 바로 그 시점에 예기치 않은 사고와 마주하곤 한다. 그건 마치 ‘우습게 알면 큰 코 다친다’는 자연의 경고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하나 명확한 것은 오프로드는 느릴수록 빠르다는 사실이다.

포장도로 주행과 정반대인 건 ‘속도의 느림’뿐 아니다. 실상 오프로드 주행은 거의 모든 영역에 있어 온로드 주행과 정반대라고 생각해도 좋다. 예컨대 포장도로 위를 짱짱하게 달리기 위해서는 차의 온갖 구석을 탄탄하게 옭아매야 한다. 차의 네 귀퉁이가 중력가속도의 영향으로 흔들리는 걸 최소화해야 움직임이 간결하고 빨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포장도로에서는 차를 규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움직임이 더 편안해진다.

일부 정통 오프로드 SUV에 있는 스웨이바 디커플링 장치가 그 한 예다. 스웨이바(Sway Bar)는 온로드 자동차로 치면 안티롤 바(Anti-roll Bar) 또는 스태빌라이저(Stabilizer)다. 좌우 바퀴 축을 잇는 얇은 파이프인데, 이걸로 차체의 좌우 흔들림을 줄이고 선회하는 차의 바깥쪽 바퀴 접지력을 보존한다. 오프로드에서 이 장치를 풀어주면 좌우 바퀴의 움직임 폭이 늘어나면서 좌우 높낮이 차이가 큰 코스를 수월하게 지날 수 있다. 인위적인 억제 없이 차체 흔들림을 ‘방치’한 덕(?)에 울퉁불퉁한 비포장길 위 승차감이 한결 자연스럽고 편안해지는 부수적 효과도 누릴 수 있고.

스포츠카의 수준이 최고속도로 결정된다면 오프로더의 수준은 최저속도가 좌우하는 점도 흥미롭다. 주행의 난이도 역시 그런데, 얼마나 정교하게 더 빨리 달릴 수 있는지가 서킷 드라이빙 난이도의 기준이라면 험로 주행의 난이도는 천천히 신중하게 움직여야 할수록 어려워진다. 스포츠카는 최고성능을 발휘하기 위해 무게를 최대한 지면에 가깝게 끌어내리려 안간힘을 쓰지만 오프로더는 안정된 험로주행을 고려해 주요 부품을 최대한 노면과 떨어뜨리려 애쓴다는 점도 양 극단에 있는 두 부류 자동차의 닮은 듯 다른 꼴이다.

#3 불현듯 스포츠카와 정통 SUV, 서킷 드라이빙과 험로주행의 평행이론 비슷한 걸 떠올린 건 두 가지 신차 때문이었다. 하나는 현대차 벨로스터 N이고 다른 하나는 지프 랭글러인데 각각 어떤 지점을 말하는지 애써 설명하진 않아도 될 듯하다. 벨로스터 N의 경우 많은 평범한 한국 운전자에게 ‘운전 재미’의 세계를 알리는 합당한 스포츠 모델로 기대가 크다. 세단, SUV 일색인 한국 자동차사회에 조금 더 다채로운 문화가 자리잡는 계기로 작용하면 더할 나위 없겠고. 궁극적으로는 공도가 아니라 서킷에서 합법적으로 스포츠 드라이빙을 즐기는 문화가 정착돼야 할 텐데, 실상 그 부분에 있어서 걱정은 적다. 꼭 벨로스터 N이 아니더라도 자동차 제조사나 수입사가 주최하는 드라이빙 아카데미나 체험 프로그램, 서킷이 운영하는 스포츠 주행 세션 등이 최근 적지 않은 까닭이다.

반면 오프로드 운전의 재미를 느끼는 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랭글러 같은 정통 SUV가 아니면 감히 넘보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서킷과 같은 인공설비가 아니라 자연환경 안에서 이뤄지는 주행이라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킨다’는 선입견도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프로드가 포장되지 않은 도로, 정해져 있지 않은 길임을 생각하면 오프로드 주행은 정통 오프로더뿐 아니라 도심형 SUV, 하물며 평범한 세단도 해낼 수 있는 일이다(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전국 산등성이에 오토캠핑장이 즐비하고, 부대낌 없이 차분한 캠핑을 즐기고 싶어 깊은 산속을 찾아 들어가는 ‘차박’족이 적지 않은 현실을 고려하면 본격 오프로더들에 환경파괴의 화살이 쏟아지는 것도 짐짓 부당해 보인다. 게다가 난 정통 오프로더들 중 그저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멀쩡한 나무를 꺾거나 울창한 수풀을 뭉개는 사람을 본 적 없다. 환경파괴는 계곡에 놀러 가 거기서 세차까지 하고 오는 피서객 쪽이 오히려 더 심각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매연 때문에 자동차가 환경오염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원흉으로 낙인 찍힌 것처럼 깊숙한 산골에서 이뤄지는 오프로드 주행이 자연파괴의 대명사로 비춰지는 것 역시 피해가기 어렵다. 스포츠카의 놀이터인 서킷처럼 SUV가 마음껏 뛰놀 수 있는 오프로드 체험공간의 부재는 그래서 더욱 아쉽다. 대체 그런 데를 누가 가느냐고? 한해 한국에서 팔리는 신차의 3분의 1 이상이 SUV인 현실이다. 실제로도 SUV로 오프로드를 즐기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지만 그건 오프로드 주행도 서킷 드라이빙처럼 ‘자동차 스포츠’의 한 영역이라는 인식이 부족한 것이 한 이유이고, 즐기고 싶어도 즐길 만한 장소가 없어서인 게 또 한 이유일 수 있다.

소형 크로스오버부터 도심형과 고급 SUV, 정통 오프로더까지 두루 만족하는 다양한 난이도의 오프로드 프로그램이 상시 운영된다면 오프로드 주행도 서킷 드라이빙처럼 당당한 자동차 놀이거리로 서서히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놀이의 일부가 된 제품은 수요도 꾸준할 테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상설 오프로드 체험 공간을 지프 브랜드로 먹고사는 FCA코리아가 마련해주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일까? 몇 해 전 영종도에 문 연 BMW 드라이빙 센터를 교본 삼아서 말이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김형준

김형준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과 <톱기어> 한국판, 남성지 <지큐코리아>에서 다년간 자동차 글을 써왔다. 글로벌 자동차 잡지 <모터 트렌드>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한층 흥미롭고 심도 깊은 자동차 문화 탐구를 위해 자유 항해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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