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형 지프 랭글러가 보낸 11년의 속도
[김종훈의 차문차답(車問車答)] 11년 만이다. 지프 랭글러가 JK에서 JL로 코드명을 새로 받았다. 전 세대가 보낸 세월만큼 JL이 책임져야 할 거다. 자동차는 보통 7년 주기로 세대 바뀐다. 랭글러는 보통 자동차가 아니니 11년이 낯설지 않다. 얼마 남지 않은 화석 같은 자동차니까. 랭글러의 신 모델을 보며 떠오른 질문은 오직 하나다. 뭘 지키고, 뭘 바꿨을까?

Q. 지프 랭글러는 11년의 세월을 어떻게 썼을까?
흘낏, 보면 잘 모른다. 신형 랭글러 외관은 랭글러의 틀에 온전히 복무한다. 여전히 딱딱한 디자인을 바탕으로 동그란 전조등에 일곱 개의 세로 그릴이 전통을 잇는다. 랭글러에 관심 있는 사람 아닌 이상 변화를 짚어내기란 쉽지 않다. 숨은그림찾기 하듯 골라내야 한다. 세세하게, 소소하게. 전조등과 세븐 슬롯 그릴을 담은 전면 패널에 굴곡을 가미한 변화처럼.
전면 패널에서 펜더 쪽으로 옮겨간 방향지시등을 바로 알아챌 사람이 있으려나. 범퍼 양 옆으로 크롬 몰딩으로 구획 만들고 넣은 안개등은 좀 눈에 들어오려나. A필러가 조금 더 누워 나름대로 날렵한 인상으로 변한 걸 간파하려나. 도어 레버가 매끈해졌다는 것도 잡아본 사람만 안다(동그란 버튼을 철컥, 누르는 맛이 사라진 건 아쉽다). 가장 뚜렷한 변화라면 등화류가 LED로 바뀐 점일 테다. 신형 랭글러는 조금씩 다듬어 새 것처럼 보이는 정도다.

대신 속을 바꿨다. 바꿨다기보다 보완했다. 11년 동안 흐른 시간만큼 사용자의 요구에 화답했달까. 인테리어에도 조금 새 것 같은 느낌을 가미하긴 했다. 하지만 랭글러의 디자인 콘셉트는 여전히 투박함이다. 보기에도 타기에도 매끈한 도로보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지향한다. 인테리어 역시 섬세함보다는 단단함을, 매끄러움보다는 둔탁함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변화의 핵심은 인테리어보다 편의장치다. 11년 동안 이제는 보편화한 각종 편의장치를 대거 적용했다. 도심형 SUV를 타던 사람에겐 당연한 장치가 랭글러에는 이제 들어간 셈이다. 앞좌석 열선 시트와 열선 내장 가죽 스티어링을 이제 적용했다니 어련할까. 도심형 SUV에겐 대수롭지 않아도 랭글러에겐 이제야 배려심이 생겼다. 더불어 더 넓은 시장으로 확장하고픈 욕망도 엿볼 수 있다. 사하라 모델이라면 도심형 SUV로서 역할도 해내길 바라니까. 사하라 모델에 적용한 실내 정숙성 높이는 액티브 노이즈 컨트롤 장치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고객층 확대. 이런 마음은 파워트레인과 하체에도 더 또렷하게 담겼다. 랭글러는 연비가 극악하기로 유명하다. 이젠 2.0 가솔린 터보 엔진을 품어 배기량 낮추고 연비 높였다. 공인 연비는 리터당 9.0km. 여전히 두 자리 수도 안 되지만, 진입 장벽을 낮춘 건 맞다. 그 점이 핵심이다. 그동안 랭글러를 마음에 품었어도 주저하던 마음에 용기를 북돋는다.

보다 성숙해진 하체야말로 진입 장벽을 대폭 낮춘다. 전 세대는 배려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직설적이었다. 온로드를 오프로드로 착각하게 하는 용한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더 걸걸한 매력을 뽐냈지만 마니아의 마음만 두드렸을 뿐이다. 이젠 온로드에서 충격을 다분히 걸러낸다. 도심형 SUV의 세련된 동작이 아쉽지 않을 수준이다. 2.0 가솔린 터보 엔진의 부드러운 반응성도 한몫한다.
그렇다고 오프로드에서 헐겁지도 않다. 당연한 말이지만, 여전히 오프로드에선 펄펄 날아다닌다. 변화의 장점은 명확하다. 오프로드를 즐기기 위해 온로드로 이동하는 길이 이제 괴롭지 않다. 한 달에 하루를 즐기기 위해 나머지 날들을 불편해하지 않아도 되는 변화. 다 듣고 보면 혹하는 사람이 있을 거다. 랭글러라는 화석 같은 자동차에 관심 있지만 이것저것 걸려 묻어둔 사람들. 그들에게 신형 랭글러는 꽤 강렬한 페로몬을 뿜어댄다.

랭글러의 변화는 여전히 느리다. 시대 흐름은 이미 랭글러와는 격차가 한참 멀다. 변해서 따라잡을 성질이 아니다. 어쩌면 랭글러는 11년 동안 덜 바뀌기 위해 노력했을지 모른다. 더 이상 넣지 않으면 고립될 장치만 추가했으니까. 랭글러가 보낸 시간은 다른 자동차와 달랐다. 모든 자동차는 최신 기술을 누구보다 먼저 적용하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랭글러는 누구보다 나중에 적용하려고 노력한다. 모두 나아가고자 할 때, 랭글러는 멈추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가는 게 쉬울까? 어지럽게 변하는 세상에서 이런 고집은 가치가 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김종훈
김종훈 칼럼니스트 : 남성지 <아레나 옴므 플러스>에서 자동차를 담당했다. 자동차뿐 아니라 남자가 좋아할 만한 다양한 것들에 관해 글을 써왔다. 남자와 문화라는 관점으로 자동차를 다각도로 바라보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