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준의 숫자 깨먹기] 2년 뒤, 아니 1년 3개월 뒤면 2020년이 시작된다. 음, 이렇게 말하고 나니 마치 밀레니엄 시대의 개막을 기다리던 때가 생각난다. 대부분 사람에게 2020년은 그 뒤로 겨우(?) 20년이 지났을 뿐인 밀레니엄 시대의 한 해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동차 업계에 2020년은 확실히 밀레니엄 시대 못지않은 상징적인 시대로 기록될 게 분명하다. 하나 더. 2020년은 자동차 업계뿐 아니라 이를 둘러싼 또는 이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ICT 산업계에도 상당한 중량감으로 다가온다. 5G 네트워크 시대가 본격화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5G는 무선 광대역 기술 기반의 네트워크다. 지금 우리가 쓰는 스마트폰은 4G 네트워크로, 5G 네트워크는 이보다 10배 빠른 데이터 처리속도를 자랑한다. 이론대로라면 유선 네트워크가 더 이상 기술발전이 없다는 전제 하에 무선 인터넷은 유선 인터넷보다 빨라진다. 5G 시대의 시작은 모든 사물이 무선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IoT(사물인터넷) 시대가 본격화된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세계 유수의 자동차 제조사가 2020년을 원년 삼아 앞다퉈 자율주행 자동차의 청사진을 소개하는 까닭이다.

5G 네트워크 테스트가 시작한 2016년 무렵부터 들려온 자동차 제조사의 ‘2020 성명서’는 그 시대를 대비하며 그려본 콘셉트카의 형태로 최근까지도 쉼 없이 나오고 있다. BMW그룹이 지난 16일 연차 주주총회에서 공개한 비전 아이넥스트(Vision iNEXT)가 대표적이다. BMW i3를 조금 더 키운 듯한 크로스오버 형태의 이 차는 순수 전기파워트레인과 운전 권한의 선택이 가능한 자율주행 자동차다. 손수 운전하는 부스트(Boost) 모드와 인공지능에 운전을 맡기는 이지(Ease) 모드 등은 지금까지 소개된 여느 자율주행 콘셉트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승객의 승하차 편의를 챙기는 캐비닛 도어 형태나 구글 어시스턴트처럼 “안녕 BMW(Hey BMW)”라고 하면 반응하는 음성인식 인공지능 비서 서비스 등도 마찬가지.
여기까지는 그저 괴팍한 키드니 그릴이 붙은 BMW 껍데기의 뻔하디 뻔한 자율주행 콘셉트카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2020년 시대를 맞이하는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더 이상 이 같은 세부 기능이나 모양이 아니라 ‘사용자 경험’이다. 비전 아이넥스트의 경우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감성의 접목을 앞세우고 있다. 예컨대 실내엔 원목과 함께 자동차 인테리어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새로운 직물 소재를 듬뿍 사용하고 있다. 뒷자리에 쓴 자카드(Jacquard)라는 직물이 대표적인데, 이 아래에는 터치 인터페이스가 숨어 있어 자카드 직물방석 위에 음표를 그려 넣으면 노래가 재생되는 식으로 활용된다. BMW는 비전 아이넥스트가 2021년 상용화할 자율주행 차의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BMW 비전 아이넥스트가 소유하는 차의 미래상을 보여준다면 볼보 360c는 공유하는 차의 이상향을 제시한다. 이달 초 공개한 360c의 경우 새로운 경험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는 것에 한층 더 열심이다. 소개 영상에는 도심 벤치에 앉은 사람이 태블릿으로 360c를 호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테블릿 화면에선 리빙(living), 오피스(office), 파티(party), 슬립(sleep)의 네 가지 선택 항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무인주행 공유차의 대표적인 활용범주로 거론되는 것들이기도 하다. 슬립 모드에서의 장면은 흡사 항공기 비즈니스 클래스 공간처럼 연출되는데, 개념상으로는 무인주행 공유 차가 단순히 단거리 이동이나 움직이는 집무실 외에 도로 위의 1인용 에어버스라는 사업모델로 확장될 가능성도 다분해 보인다.

2020년에 출시하는 건 아니지만 2020년형으로 소개되고 있는 최신 자동차들도 눈길을 끈다. 가장 최근엔 메르세데스 벤츠가 GLC를 토대로 한 크로스오버 EV EQC를 소개했다. EQC는 80kWh 용량 리튬이온 배터리를 담고 유럽 기준 450km 이상의 주행거리와 0→시속 100km 가속시간 5.1초의 성능을 확보했다.

2020년형으로 출시할 새로운 EV는 이 밖에도 더 있다. 아우디는 며칠 뒤 그들의 첫 번째 EV SUV e-트론을 정식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Q5와 Q7 사이에 위치하는 중형 크로스오버로 95kWh 리튬이온 배터리 팩을 얹고 WLTP 테스트 기준 400km의 주행거리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포르쉐도 미션-E 콘셉트의 양산 모델을 내년부터 타이칸(Taycan)이라는 이름으로 생산한다고 밝혔다. 타이칸과 관련해 지금까지 알려진 정보는 앞뒤 모터가 내는 600마력의 최고출력, 0→시속 100km 가속시간 3.5초와 0→시속 200km 가속시간 12초 미만, 유럽 NECD 기준 주행가능거리 500km 이상 정도다.

독일 브랜드의 테슬라 대항마가 속속 등장하는 가운데 기아자동차는 3열 좌석 구성의 풀사이즈 SUV 텔룰라이드를 최근 뉴욕패션위크에서 깜짝 공개했고, 제네시스 브랜드의 미국 수장 어윈 라파엘(Erwin Raphael)은 미국 기자들 앞에서 GV80으로 알려진 첫 번째 제네시스 SUV가 2020년 초부터 판매에 들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근데 이것도 ‘2020 성명서’로 볼 수 있는 걸까? 기아차와 제네시스는 미국에서 고전 중이다. 그러니까 흠, 그들에겐 5G 기반 자율주행 차나 크로스오버 EV 못지않게 화급하고 중대한 이슈란 얘기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김형준
김형준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과 <톱기어> 한국판, 남성지 <지큐코리아>에서 다년간 자동차 글을 써왔다. 글로벌 자동차 잡지 <모터 트렌드> 편집장을 거쳐 현재는 한층 흥미롭고 심도 깊은 자동차 문화 탐구를 위해 자유 항해 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