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대형 세단 멸종 위기, 남의 얘기 아니다

“국산 고급 대형 세단은 한 차종이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지만, 수입차 공세가 거세서 위상은 공고하지 못하다. 당장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임유신의 업 앤 다운] 잘 나가는 차가 계속 잘 나가지는 않는다. 시대가 변하면 위상도 변하고 처지도 달라진다. 애초에 별 볼 일 없는 차는 부진하면 티가 나지 않지만, 잘 나가던 차가 고꾸라지면 충격이 크다. 심하면 사라지기도 한다. 간혹 부활하기도 하지만 예전 명성을 되찾는 경우는 드물다. 오랜 전 일이지만 폭스바겐 비틀은 국민차로 명성을 날렸다. 1세대 비틀은 누적 판매 대수가 2000만대가 넘을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비틀은 현대적으로 부활해서도 아이콘으로 추앙받았다. 그런데 최근 비틀 단종 소식이 들려왔다. SUV에 밀리고 판매가 저조해 내년 여름을 끝으로 생산을 중단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경우는 종종 있었고 국내도 예외는 아니다. 현대자동차 쏘나타는 국민차 칭호를 받으며 잘 나가는 차종이었다. 쏘나타는 승승장구했고 내놓기만 하면 베스트셀러 자리는 따놓은 그런 차였다. 부진에 빠지는 경우는 예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시장은 변했다. 더 고급스럽고 비싼 그랜저가 쏘나타 시장을 잠식했다. 수입차와 가격 격차가 줄면서 고객이 이탈했고, SUV가 인기를 끌면서 관심이 예전보다 떨어졌다. 다른 차와 비교하면 많이 팔리는 편이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기세가 많이 꺾였다. 8세대 쏘나타가 나오면 판도가 뒤집어질지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 중형 세단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서 예전 같은 성공을 장담하기 힘들다. 쏘나타에 이런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결국은 현실이 됐다.



현재 가장 불안한 분야는 국산 고급 대형 세단이다. 지금 고급 대형 세단 시장은 수입차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가격대도 높은데 잘 팔린다. 대수로 따지면 국산차가 앞서지만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국산차가 부진하다. 국산차라고 해봐야 현대차 EQ900 한 종류다(기아차 K9은 EQ900보다 아랫급으로 분류). 예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국산 고급 대형 세단이 확고한 영역을 지켰다. 소수 부유층이 타는 수입 고급 대형 세단과는 시장 자체가 달랐다. 푹신한 승차감, 풍부한 편의장비, 수입차 대비 저렴한 가격을 비롯해 화려하고 풍성한 뒷좌석 등 한국 고객의 취향에 기가 막히게 잘 맞췄다.



호시절은 쌍용 체어맨과 현대차 에쿠스가 경쟁하던 때다. 체어맨이 에쿠스와 대등한 경쟁을 벌일 정도로 두 차종은 막상막하 대결을 벌였다. 굳이 수입 대형 세단을 사지 않아도 국산 대형 세단을 만족하며 탈 수 있었다. 수입차는 국산차와 가격 차이도 컸지만 주변 눈치 때문에 꺼리는 경향도 만만치 않아 국산차에 유리한 상황이었다.

지금은 예전 같지 않다. 국산차와 수입차의 가격 차이도 줄었고, 수입차가 보편화 되면서 대형 세단도 눈치 보지 않고 타는 분위기가 퍼졌다. 오히려 수입 대형 세단을 타야 더 알아준다. 국산 고급 대형 세단을 타야 할 이유가 줄었다. 국산 대형 세단이 좋아졌다고 해도 브랜드 인지도나 품질, 완성도 등에서 여전히 국산차와 수입차 사이에 격차가 존재한다.



국산 대형 세단이 줄어든 이유 중의 하나는 차종 감소다. 에쿠스는 제네시스 브랜드로 갈아타는 등 계속해서 진보하며 발전했지만 체어맨은 에쿠스와 맞먹던 기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걷다가 사라졌다. 에쿠스가 제네시스 EQ900으로 바뀌고 홀로 남아 독점하는 구조가 됐지만, 독점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수입차라는 버거운 상대가 기다리고 있어서다.

특히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는 가격이 비싼데도 꾸준하게 잘 팔린다. 다른 수입 고급차와 비교해도 독보적이다. S클래스 하나로도 버거운데 선택 폭도 늘었다. 예로부터 시장을 지키던 BMW 7시리즈나 아우디 A8, 렉서스 LS, 재규어 XJ에 더해 캐딜락 CT6, 링컨 컨티넨탈 등이 합류했다. S클래스나 7시리즈 외에는 판매량이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지만 나머지 차종의 판매량을 한데 모으면 적잖은 수가 된다.



S클래스의 강점은 꾸준함이다. 신차 효과도 크고 신차 효과 감소폭도 작다. 계속해서 잘 팔린다. EQ900은 신차 효과 이후 판매량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조만간 부분변경 모델이 나오면 판매량이 뛸지 모르지만 그 효과가 계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국산차 특히 현대차의 완성도가 높아져서 수입차와 격차가 많이 줄어들었다. 대형 세단은 기함이라 업체들이 심혈을 기울여 공들여 만든다. 현대차가 발전하는 속도 이상으로 수입차가 빠르게 앞서 나간다. 무엇보다 제네시스 브랜드가 인지도를 쌓는 속도가 더디다. 국산차로서는 빠르게 자리 잡았다고 평가받지만, 수입 고급차 브랜드를 따라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 판매량도 꾸준하게 유지하지 못한다.



수입 대형 세단 선호도가 심화하고 계속해서 공세가 이어지면 EQ900의 운명도 장담할 수 없다. 국산 대형 세단만의 고유한 영역도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EQ900의 올해 1~8월 판매량은 5550대다. 1월 939대, 2월 843대, 3월 992대, 4월 913대, 5월 836대, 6월, 622대, 7월 501대, 8월 405대다. 5월까지 800~900대를 유지하다가 이후 급속히 떨어졌다. 같은 기간 S클래스는 6000대 팔렸다. 평균 가격을 기준으로 S클래스가 EQ900보다 대략 두 배인 점을 고려하면 대수 이상으로 격차가 벌어진다.

EQ900이 수입 고급 대형 세단과 같은 시장에서 경쟁한다지만 엄밀히 따지면 분리된 시장이다. 국산 대형 세단은 차종 하나밖에 없는 작은 시장이다. 사람들 눈이 계속 높아지고 수입차 선호가 심화하면 수입 고급 대형 세단으로 이동은 더 늘어난다. 국산 대형 세단 시장이 당장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명맥만 유지하는 시장이 될 가능성도 전혀 없지는 않다. 한창 잘나가던 예전의 영화는 정말 옛날 얘기로 남을지도 모른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임유신(<탑기어> 한국판 편집장)

임유신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 <모터 트렌드>, 등을 거쳤다. 현재 글로벌 NO.1 자동차 전문지 영국 BBC <탑기어>의 한국판 편집장으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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