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공정의 가치와 효율성의 동반

[김태영의 테크 드라이빙] 벤틀리 수석 디자이너 슈테판 지라프와 프리미엄 자동차 브랜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폭스바겐 그룹이 개최한 셰이빙 더 퓨처(Shaping The Future) 행사에서였다. 여러 내용이 오갔지만, 가장 큰 지중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미래 지속 가능성이었다. ‘소량 생산, 장인 정신 같은 현재의 가치가 미래에도 유지될 수 있는가’ 같은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앞으로 등장할 새로운 형태의 모빌리티에도 장인들이 만든 부품이 사용되나’ 혹은 ‘그런 변화 후에도 브랜드가 수익을 유지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벤틀리 같은 프리미엄 브랜드는 역사와 유산을 유지하면서도 빠르게 새로움을 추구해야 합니다. 과거와 미래, 이 두 가지는 상반되는 개념이라 모두 만족시키기 어렵죠. 하지만 우리는 장인정신이라는 핵심 가치를 새로운 모빌리티 형태에도 지속적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등장할 벤틀리는 새로운 변화가 70%, 유산과 전통을 유지하는데 30% 정도의 비중을 유지할 겁니다.” 슈테판 지라프 벤틀리 수석 디자이너는 느리고, 소량으로 제작하는 방식에도 미래가 있다고 했다. 첨단 기술이 이 부분에도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다.



흔히 최신형 자동차 공장의 미래는 차를 더 빠르게 만드는 데 있다고 한다. 이전보다 정교하고, 효율적인 공정으로 같은 시간 동안 제품을 더 많이 생산하는 것이다. 시간은 곧 수익과 연결된다. 같은 관점에서 장인정신에 바탕에 둔 소량 생산은 수익과 거리가 있다. 제품을 만드는 데 눈에 보이지 않는 막대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기에 결과적으로 제품의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장이 정해져 있으며, 확장은 느리고 변화가 어렵다. 반면 최근에는 최첨단 기술이 느린 공정과 접목되는 효과적인 사례도 속속 등장한다. 이들의 제조 과정은 여전히 느리지만, 한층 효율적인 방법으로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것이다.



영국 크루에 위치한 벤틀리 뮬산 공장을 예로 들자. 이곳에서는 수백 시간마다 단 한 대의 자동차가 만들어진다. 1년에 약 2000여 대의 자동차가 생산된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자동차는 궁극적으로 수제작을 기본으로 한다. 물론 모든 과정이 수제작은 아니다. 인간이 실수할 수 있거나 효율이 떨어지는 부분에선 아주 정밀한 자동화 장치가 대신한다. 사람과 기계의 ‘혼합 조립 과정’인 셈이다.

여기서 벤틀리 뮬산 공장의 자동화 로봇은 반복적인 동작 외에도 다양한 일을 할 줄 안다. 예컨대 뮬산 조립 라인에 위치한 두 로봇은 알루미늄 도어와 보닛, 트렁크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립한다. 한 로봇이 보디 패널에서 다양한 부착물을 장착하는 동안 다른 로봇이 안쪽 패널을 고정한다. 이때 숙련된 기술자들이 필요한 곳에 접착제를 바른다. 그러면 첫 번째 로봇이 작업에 필요한 공구를 스스로 바꿔가면서 바깥 패널 테두리를 안쪽으로 접어서 도어를 완성한다. 반복적인 기계가 가득한 설비였다면, 같은 작업을 위해 몇 번이나 장소를 옮겨야 한다. 하지만 최첨단 기술의 도움으로 이들은 한자리에서 어려운 공정을 완벽하게 끝낼 수 있다.



물론 벤틀리는 첨단 기술 외에도 제품을 만드는 데 대단히 많은 에너지를 쓴다. 장인이라고 불리는 기술자(특정 수작업 경력이 40년에 이르는 기술자도 있으며, 일부는 대를 거쳐 기술을 전수한다)들이 실제 나무를 가공하고 트림을 여러 장 붙여 광을 내는 작업을 한다. 상처가 없는 소 9~17마리의 가죽을 이용해 실내를 만든다. 그리고 가죽의 모든 이음새를 재봉틀을 이용해 직접 바느질한다. 이들은 차를 만드는 과정에 겉과 속을 가리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시간을 쓴다. 엔진을 만들고 모든 검사를 마무리하는 시간까지 합치면 벤틀리 한 대당 평균 2000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벤틀리 외에도 첨단 기술이 어려운 제조 공정에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예는 많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하이오 매리스빌에 위치한 혼다(아큐라) NSX 퍼포먼스 제조 센터도 그렇다. 이 공장에서는 비슷한 플랜지 롤링 로봇으로 복잡한 스탬핑 작업을 한자리에서 마무리한다. NSX에 사용되는 주조 압출 알루미늄 스페이스 프레임은 약 35m 라인을 따라 설치된 로봇들의 미그 용접(와이어를 전극으로 하고 아크를 발생시켜 실시하는 용접)으로 완성된다. 로봇은 사람보다 움직임이 빨라서 용접할 때 각 부품에 훨씬 적은 열을 가한다. 보니 패널에 열이 적게 가해질수록 뒤틀림 같은 변형률이 줄어든다. 여기서 한 수 앞서서 로봇은 패널의 뒤틀림까지 계산하도록 프로그래밍 된다.



또 신형 NSX는 특별한 제작 기법을 여럿 사용한다. 보디에 전기를 흘려 지르코늄 입자를 입히는 새로운 전기 코팅 페인팅 기술이 대표적이다. NSX 화이트 보디를 수조에 넣었다 빼는 과정에 전기를 흘려 지르코늄(표면 정리, 내열성 확보)을 표면에 강하게 밀착시킨다. 이런 과정을 통해 차체에 녹이 발생하는 것을 막아주며, 페인트 도표 과정에서 사용량도 크게 줄어든다(약 10kg 이상). 페인트 도포에 지저분한 침전물도 남기지 않는다. 차체에 페인트가 상할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패널을 거의 마지막에 장착한다는 것도 특징이다. 다시 말해 차체에 모든 부품을 달고 보디 패널을 가장 마지막에 얹는다. 이런 제작 방식은 여느 자동차 공장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첨단 자동화 공정의 발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벤틀리와 혼다(아큐라), 위의 두 공장은 제작 속도와는 별개로 더 많은 가치를 실현하고 있다. 이전의 자동차 공장과 비교하면 거의 비슷하거나, 혹은 더 느린 일 처리 방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를 만드는데 거의 모든 규격을 완벽하게 실현한다는 것은 분명한 장점이다. 물론 두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은 전혀 다르다. 장인 정신과 효율성의 극대화. 하지만 어떤 목적을 가지든지 기계가 투입되는 시간이 더 길어지면서 분명 더 높은 품질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이는 겉보기에는 비슷한 점이 거의 없어 보이는 두 회사의 분명한 공통점이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김태영

김태영 칼럼니스트 : 중앙일보 온라인 자동차 섹션을 거쳐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 <자동차생활>, <모터 트렌드>에서 일했다. 현재는 남성지 <에스콰이어>에서 남자들이 좋아하는 소재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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