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이루어진다, 미드십 엔진 2인승 스포츠카

“매일 15시간 이상을 스튜디오에서 보냈다. 자정 무렵 집으로 돌아왔고, 새벽 댓바람에 다시 스튜디오로 출근. 주말도 마찬가지였다. 수험생 시절에도 경험하지 않았던 코피가 터졌다. 거울을 봤더니 머리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임범석의 디자인 에세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동안 자동차 디자이너와 자동차 엔지니어 사이에 이런저런 충돌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디자이너 요구와 엔지니어의 주장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중요한 사항은 엔지니어가 결정하고, 디자이너는 엔진 위에 껍데기만 입힐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물론, 엔지니어 입김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곳도 있지만, 우리 스튜디오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디자이너와 엔지니어 경계가 조금 흐려졌다고 할까?

취업비자에 새겨진 내 직책은 디자이너가 아닌, 보디 관련 엔지니어였다. 서류상 나는 엔지니어였다. 그리고 나의 ACCD 졸업장에도 공학사 학위가 찍혀 있다. 물론, 나는 전문 엔지니어가 아니다. 엔지니어 교육이 필요했다. 학교에서 배웠던 기본적인 공학 관련 지식들이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대부분은 내가 알아서 익혀야 했다.

프로젝트 기간 동안 모델 컷-어웨이 연구에 많은 시간을 썼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엔지니어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너무 많은 걸, 너무 자주 물어봤기 때문일까? 엔지니어가 나를 슬슬 피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엔지니어가 도망을 다닌다는 확신이 들 무렵, 어느 날 그 친구가 부품의 치수, 모양 등 엔지니어링 관련 두꺼운 파일뭉치를 던져 주었다. 참고서나 다름없었다. 물론, 지금은 이런 서류뭉치가 없다. 컴퓨터에 저장해 놓는다.

디자인을 위한 엔지니어링 관련 정보가 필요할 때마다 서류뭉치를 뒤적였고 논쟁을 펼쳤다. 이 엔지니어는 가장 큰 도움을 주는 후원자이자 가장 시끄럽게 싸워야 하는 논쟁자였다. 우리는 엔진부터 서스펜션, 보디, 심지어 도어와 윈도 몰딩 등 모든 부분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유는 하나. 우리는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함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기획안에 꼭 포함시키고 싶은 항목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 말끔한 보디라인을 위해 보디 안으로 집어넣는 개폐식 지붕. 지금이야 하드톱이 흔하지만 당시만 해도 쉽게 볼 수 있는 모델이 아니었다. 둘째, 넓고 깨끗한 짐공간 확보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아이디어가 서랍처럼 만든 트렁크공간이었다. 셋째, LED 헤드램프였다. 당시 LED 사용은 초기단계였는데, LED를 써 이전과는 다른 프런트엔드 디자인을 그리고 싶었다.

전체적인 보디스타일은 공기역학에 초점을 맞추었다. 당시 모든 미드십 엔진 모델은 사이드에 커다란 공기흡입구를 달고 있었는데, 스포츠카의 트레이드마크이기도 했다. 하지만 공기역학 측면에서 보면 사이드 에어인테이크는 공기흐름을 방해하는 요인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없애고 싶었다. 과열된 엔진을 식히기 위해서는 에어인테이크가 당연히 필요하다. 내가 생각한 방법은 에어인테이크를 펜더 위쪽으로 옮기는 것.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 경주차에서 볼 수 있는 방식이다.

그리고 내 아이디어가 선구적인 역할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양산형 미드십 엔진 스포츠카 옆에 달려있던 에이인테이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페라리가 458의 에어인테이크를 펜더 위쪽으로 옮겼고 람보르기니 역시 우라칸의 에어인테이크를 아래쪽으로 밀어내 몸통 라인을 한결 깔끔하게 했다.



프로젝트를 위해 디자이너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몇 주였다. 디자이너들은 그들의 아이디어를 세련미 넘친 제안서로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분주한 가운데에서도, 매니저들은 디자이너들의 작업에 어떤 간섭도 하지 않았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기획안에 담으면 됐고, 기획안이 뽑히면 그 내용대로 디자인을 하면 되는 것이다. 채택되지 못하더라도 이전에 하던 일에 또 집중하면 그만이다.

야근의 연속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튜디오에서 보냈던 저녁시간에 창의성이 최대로 발휘됐던 것 같다. 저녁 이후에는 젊은 디자이너들만 남는다. 모두들 책상에서 떠나지 않는다. 펜 긁는 소리, 마커 움직이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스튜디오에는 자동차를 사랑하는 열정으로 가득했다.

마침내, 내가 낸 기획안이 우리 스튜디오 최종안으로 뽑혔다. 운이 좋았고, 많은 동료들의 도움을 받은 덕이다. 다른 디자이너들이 나의 기획안을 보고, “정말 타보고 싶은 차를 만들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우리처럼 젊은이들이 원하는 건 최고급 슈퍼카가 아니라, 합리적인 가격에 즐거움을 주는 자동차”라는 말도 덧붙였다.

기획안을 들고 HQ로 갔다. HQ 반응도 괜찮았다. HQ 소속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좋아했다. 그리고 나의 기획안이 HQ 경쟁에서 풀사이즈 자동차 제작 부문에 뽑혔다. 행복했다. 기뻤지만, 행복에 계속 취해 있을 수만은 없었다. 힘든 일이 곧바로 시작될 것이기에.

다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3개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곧바로 풀사이즈 모델 제작에 들어갔다. 돌발상황 발생. 내 기획안에는 인테리어 디자인이 없었다. 사실, 익스테리어 모델을 기획할 때, 인테리어를 생략하거나 따로 디자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내가 기획안은 컨버터블이었고, 그것이 풀사이즈 모델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인테리어가 필요했다.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기존 모델에서 인테리어를 빌려오는 것이다. 즉, 내가 기획한 컨버터블에 어울리는 페달, 시트, 대시보드 등을 기존 모델에서 가져오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새로 디자인하는 것이다. 결정했다. 내 기획안에 어울리는 새로운 인테리어를 디자인하기로 말이다.



익스테리어와 인테리어를 동시에 디자인하는 건 처음이었다. 사실, 익스테리어 디자이너는 익스테리어,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인테리어에 집중을 하지, 한 명의 디자이너가 동시에 둘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건 다른 스튜디오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있는 곳이 미래를 기획하는 어드밴스드 스튜디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테리어 스케치를 매니저에게 제출했고, 오케이 사인을 받았지만 내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다. 너무 구식의, 일반적인 인테리어였던 것이다. 다시 디자인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후 3개월 동안 초과근무 600시간이 넘을 거라는 걸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매일 15시간 이상을 스튜디오에서 보낼 것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자정 무렵 집으로 돌아왔고, 새벽 댓바람에 다시 스튜디오로 출근. 주말도 마찬가지였다. 수험생 시절에도 경험하지 않았던 코피가 터졌다. 거울을 봤더니 머리에 커다란 구멍이 있다. 원형탈모였다. 이런 젠장. 아직까지 젊디젊은 내가 곧 민머리가 되는 걸까? 아팠다, 마음이….

마음은 아렸지만 몸은 지치지 않았다. 열정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졌고, 그만큼 즐거움은 배가 됐다. 이런 게 젊은 디자이너의 특권 아닐까? 눈 깜짝할 사이에 3개월이 지났고, 마침내 인테리어까지 완성할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고의 기쁨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걸까? 완벽한 스포츠카를 디자인하고 싶었던 내 어린 시절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HQ에 전시했고, 젊은 디자이너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최고경영진 또한 깊은 관심을 보였고, 생산 타당성 조사를 지시했다. 그리고 마침내 생산모델로 결정되었다.

결론만 이야기 하자면, 양산까지 이어지지는 앉았다. 생산을 위한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을 즈음, 일본 경제가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일본 자동차시장 상황도 바뀌어 스포츠카 및 쿠페 인기가 급격히 시들었고, SUV 및 CUV 같은 새로운 모델이 뜨기 시작했다.

양산모델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슬프거나 기가 꺾인 건 아니다. 자동차 디자이너에게 이런 일은 최고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또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내가 꿈꿨던 스포츠카를 직접 디자인했고, 그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그리고 책상 위에서 또 다른 프로젝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임범석 (전 미국 ACCD 디자인학과 교수)

임범석 칼럼니스트 : 미국 ACCD를 졸업하고 GM 및 혼다에서 디자이너 생활을 했다. 이후 한국인 최초로 ACCD 교수를 역임하며 미래 자동차업계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했다. 최근 중국으로 활동무대를 넓혀 글로벌 디자인 컨설턴트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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