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자동차는 RV에 강하다. 예로부터 RV에서 두각을 나타내 RV 명가라는 영예로운 칭호도 얻었다. K시리즈는 디자인 혁신과 새로운 정체성을 선보이며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2세대를 거친 K시리즈가 더 높은 완성도를 바탕으로 세단 명가를 완성하려고 한다.”

영화판은 냉혹하다. 잘 나가는 배우도 몇 년 지나면 식상해 보여서 인기가 예전만 못해진다. 반짝 떴다 사라지는 배우는 수없이 많다. 반면 수십 년을 한결같이 사랑받는 영화배우가 있다. 영화 수십 편에 얼굴을 내밀어도 늘 새로워 보인다. 오래도록 명배우로 인정받는 비결은 무엇일까? 바로 연기 변신이다. 개성과 정체성이 강해도 오랜 인기를 장담할 수 없다. 비슷한 모습이 반복되면 지루해진다. 이렇게 사라지거나 한 물간 취급받는 배우가 한둘이 아니다. 연기 변신에 능하면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관객들은 다음 영화에서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한다. 확고한 개성과 정체성을 확립하고, 연기 변신을 거듭하며 다듬어 나가야 명배우 반열에 오른다.
자동차회사도 배우와 다르지 않다. 오래도록 명성을 유지하며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잘 나가다 고꾸라지기도 하고, 인기를 끌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정체성 유지는 중요하지만 너무 똑같은 모습으로 일관하면 어느 순간 외면 받는다. 확고한 정체성을 유지하되 시대 흐름과 기술 발전에 맞춰 변화해야 오래간다.

자동차산업 후발주자였던 우리나라도 1950년대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오랜 시간 역사를 쌓아 올렸다. 여러 자동차회사가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현재까지 이어간다. 영화배우 세계와 마찬가지로 인기와 배우로서 수명은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인다. 연기 변신을 선보이며 인기를 이어가는 배우 같은 자동차회사로 국내에서는 기아자동차를 꼽을 수 있다.
기아자동차는 예전에 ‘기술의 기아’라고 불렸다. 기술 국산화나 자체 디자인 등 선도적인 시도에 앞장섰다. 신모델 도입이나 개발에도 적극적이었다. 성능 위주 엔진 세팅으로 역동성이 두드러진 점도 기술의 기아 이미지를 세우는 데 한몫했다.

이후 인상적인 연기 변신은 ‘디자인 기아’다. 혁신적인 디자인 변화를 위해 디자인 거장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했다. 역동적인 디자인을 입힌 K5와 K7을 시작으로 기아차 디자인이 변하기 시작했다. 호랑이 코 그릴은 기아차의 새로운 패밀리룩 정체성으로 자리 잡았다. 국산차 업체 중 디자인 분야에서는 가장 먼저 기아차가 떠오를 정도로 놀라운 성과를 이뤘다.
연기 변신은 그치지 않는다. 기아차는 몇 년 전부터 ‘RV 명가’로 불린다. 미니밴 시장에서는 카니발이 오랜 세월 독주하는 중이고, 쏘렌토는 중형 SUV 시장에서 꾸준한 인기를 끈다. 스포티지와 모하비도 각자 분야에서 독자 영역을 구축했다. 쏘울은 박스카로 독특한 개성을 뽐내고, 니로는 국산차 유일 친환경 하이브리드 소형 SUV로 사랑받는다. 2015년에는 기아차 RV가 전 세계 판매 1000만대를 돌파했다. 기아차에서 RV 비중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는 대기록이다.

‘RV 명가’라는 말이 나온 지는 그리 오래지 않지만 RV 역사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 기아차 최초로 소형 SUV 록스타를 선보였고, 1993년에는 세계 최초 도심형 콤팩트 SUV 스포티지를 독자 개발해 선보였다. 이후 카니발과 쏘렌토, 모하비, 쏘울 등이 속속 등장했다. 특히 카니발과 쏘렌토는 기아차를 대표하는 모델로 인식될 만큼 비중 있는 역할을 해낸다.
요즘 SUV가 대세 차종으로 떠올랐다. RV 라인업이 탄탄한 기아차에 더 없이 유리한 상황. 한 지붕 형제차인 현대자동차 싼타페와 투싼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기아차는 RV 시장에서 꾸준한 인기를 유지한다. 올해 9월까지 싼타페는 7만9777대, 쏘렌토는 5만596대 팔렸다. 싼타페가 신형 모델이고 내수 1위를 독차지하는 인기를 고려하면, 쏘렌토가 신모델이 아닌데도 선방한 셈. 기본기가 탄탄하고 상품성을 강화한 연식 변경 모델이 좋은 반응을 얻은 결과다. 준중형 SUV 분야에서는 투싼 2만8700대, 스포티지는 2만7802대다. 얼마 전에 투싼 신형이 선보였지만, 누적 판매 대수는 거의 비슷하다.

RV 명가로서 확고한 입지는 구축했지만, 햇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는 법. 세단 라인업인 K시리즈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SUV 시대라지만 국내 시장에서 세단 선호도와 비중은 무시할 수 없다. 또 다른 연기 변신을 준비해야 할 때다. 연기 변신의 목표는 ‘세단 명가’를 통한 모든 라인업의 고른 역량 발휘다. 종합 브랜드 본연의 모습을 되찾겠다는 뜻이다.
K시리즈는 2009년 K7에서 시작했다. 디자인을 혁신적으로 바꾸고 알파뉴메릭 시리즈 이름을 적용해 국산차 시장에서 신선한 새바람을 일으켰다. 준대형차 K7에서 시작해, 중형 K5, 준중형 K3, 대형 K9을 선보이며 시리즈를 완성했다. 반응은 상당히 좋았다. 그동안 국산차에서 보기 힘들었던 역동적인 디자인이 새롭게 다가왔고, 브랜드 정체성을 살린 통일된 모습이 호감을 얻었다. 형제 브랜드인 현대차가 주도하는 세단 시장을 뒤흔들 정도로 K시리즈 효과는 컸다.

RV 명가에 이은 세단 명가를 향한 K시리즈의 변화는 2세대 모델이 나오면서 본격화했다. 기아차 세단의 상징 같은 존재인 K5는 2세대로 바뀌면서 정체성을 강화하는 전략을 폈다. 급격한 반전보다는 계속해서 확고한 인상을 심어주려는 의도다. 유럽 고급차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향을 따라 국산차에도 정체성 강화 트렌드를 입혔다. K5는 현대차 쏘나타와 더불어 국산 중형차 주력 모델로 자리 잡아 꾸준한 인기를 이어간다.
K7은 디자인을 더욱 세련되게 다듬어 고급차 감성을 한층 키웠다. 음각 그릴과 Z자 주간주행등 등을 이용해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완성했다. K3 2세대는 세련되고 역동적인 디자인으로 변신했다. 스포츠 세단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강인하고 매끈한 디자인을 완성해 ‘디자인은 역시 기아’라는 평가를 끌어냈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명예회복에 성공한 K9이다. 1세대 K9은 기함이었지만 사실상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현대차 G80과 EQ900 사이를 메우는 라인업 전략 때문에 위치가 모호했다. 오너들이나 직접 타본 사람들 사이에서 평가는 좋았지만, 신차효과 이후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2세대 K9은 디자인을 개선하고 상품성을 높였다. 포지션은 그대로 유지하되 현 위치의 특색을 살려 장점을 극대화했다. 특히 더욱 고급스러워지고 정체성을 강화한 디자인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K9은 매월 1000대 이상 꾸준하게 팔리며 기아차 기함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K3부터 K9까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세단 명가를 목표로 한 연기 변신은 시장의 인정을 받았다. K시리즈는 RV 라인업과 함께 판매를 이끌어가며 기차 라인업 양대 축 중 하나로 제구실을 해낸다. 연기 변신의 또 다른 효과는 기대다. 관객들은 배우가 다음 영화에 어떤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할지 고대한다. 변화무쌍한 자동차시장에서 자동차회사는 변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 기아차의 다음 연기 변신이 기대되는 이유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임유신(<탑기어> 한국판 편집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