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차는 이래야 한다고 이미 그림을 그렸다. 지금까지 내가 보고 생각했던 것들이, 미래에도 그대로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그림과 전혀 다르니, 이상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스스로 최면을 걸어버렸다”

[최고의 반전] *선입견: 어떤 대상에 대하여 이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고정적인 관념이나 관점. 포르쉐가 카이엔을 처음 등장시켰을 때, 현재의 카이엔이 될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자동차 브랜드, 자동차 엔지니어링, 그리고 자동차 디자인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던 시절, 그래도 포르쉐만큼은 눈에 들어왔다. 친구가 그런다. 포르쉐 대시보드에 만 원짜리 한 장 붙인 뒤, 출발과 함께 대시보드에 손을 뻗어 10초 내에 만 원짜리를 잡으면 10만 원을 주겠다고. 당시에는 무슨 의미인지도 몰랐지만, 어쨌든 빠른 차라는 건 느낄 수 있었다. 10만 원을 벌겠다고 포르쉐를 렌트할 곳도 없고, 그 귀한 차를 갖고 있는 친구도 없었다.
개구리를 닮았지만 멋진 차, 눈 깜짝할 사이에 앞차를 따라잡는 차, 땅바닥과 한 몸이 될 정도로 납작한 스포츠카, 그리고 이런 차를 만드는 포르쉐.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2003년)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스포츠카만을 만들 메이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커다란 SUV를 데리고 왔다. 믿음, 배신, 전통, 쓰레기…. 전세계 미디어가 쏟아낸 단어들이었다. 나 역시 이 비판에 동참했다. 경영상태가 아무리 좋지 않다고 해도, 어떻게 포르쉐가 이럴 수 있나?
그렇기에, 성공할 수도 없고 성공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런데 막상 탔더니 또 그게 아니었다. SUV도 스포츠카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덩치 큰 카이엔으로도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말했던 만 원짜리 잡기 내기를 해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에도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이건 포르쉐가 아니라고. 생긴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 황소개구리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포르쉐의 실험정신에 높은 점수를 줬고, SUV로 만든 스포츠카에 엄청난 박수를 보냈다. 미디어 역시 목소리를 바꾸기 시작한다. 세상에 없던 SUV가 태어났다고. 마침내 대박에 대박을 터뜨린 포르쉐. 세계 곳곳에서 카이엔은 포르쉐에게 현금다발을 전해준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현금자동인출기. 거칠 것이 없었고, 2세대를 거쳐 최근 3세대가 나왔으며 여전히 포르쉐 전성기를 이끌고 있다.

선입견을 완전히 깨부순 차가 한 대 더 있다. 그랬다. 쌍용차는 대한민국 최고의 SUV 명가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 대한민국 SUV는 코란도로 통했다. 당시 SUV 좀 안다고 힘깨나 주려면 코란도를 타야 했다. 코란도 역사를 줄줄이 꿰고 있다. 쌍용차가 잠깐 대우 소속이었을 당시 코란도 라디에이터 그릴이 세로 바로 바뀌었던 것도 귀신 같이 찾아낸다. 코란도 바퀴를 큰 것으로 바꿔 달고 타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코란도 동호회 모임이 끊이지 않았다. 주말이면 곳곳에서 록 크롤링, 타임 트라이얼 등 오프로딩 관련 이벤트도 열렸다. 물론 출전차 반 이상이 코란도 형제들. 그렇다고 코란도가 오프로더 역할만 한 건 아니다. 날렵한 몸매의 뉴 코란도는 도심주행도 거뜬히 해냈다. 그야말로 코란도 시대였다. 코란도가 SUV였고, 덕분에 쌍용차는 최고의 SUV 메이커로 인정받았다.
쌍용차 상황이 안 좋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러시아 쪽에서 쌍용차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결국 중국으로 갔다. ‘먹튀’라는 이야기가 떠돌았고, 다시 인도로 넘어갔다.

비슷한 시기, 국내 SUV시장은 빠르게 바뀌어 간다. 오프로드 활동이 뜸해지면서 그와 동시에 모노코크 보디에 예쁘게 화장을 한 도심용 SUV가 도로를 점령한다. 코란도 단종소식이 들렸다. 전세계 SUV 붐을 타고 수입차 메이커도 대대적인 SUV 공세를 펼친다. 메르세데스-벤츠가 M-클래스로, BMW가 X5로 럭셔리 SUV 출몰을 일으키더니 스포츠카 메이커 포르쉐마저 카이엔으로 SUV시장을 두드렸다. 2000년 중후반, 국내 수입차시장 맨 위에 BMW X5, 혼다 CR-V, 렉서스가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세단이 아닌 SUV로 말이다.
2011년. 쌍용차가 모노코크 타입의 코란도를 부활이라는 단어와 함께 출시했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자동차는 시간보다 더 빠르게 진화했고, 자동차를 보는 사람들의 눈은 이보다 더 빠른 속도로 높아진다. 최고의 SUV로 사람들을 설레게 했던 코란도는, 쌍용차 SUV는, 유행을 좇지 못했다. 사람들은 현대차 투싼과 기아차 스포티지에서 눈을 돌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코란도 전성기 시절, 다른 메이커가 코란도를 잡고 싶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상황과 비슷했다.

쌍용차가 소형 SUV 티볼리를 발표한다. 2015년이다. 어색했다. 쌍용차와 티볼리 조합은 왠지 어색했다. 쌍용차는 어깨 쫙 펼친, 군데군데 근육을 자랑하는 위풍당당 SUV여야만 했다. 그런데 호리호리한 샌님 같은 소형 SUV다. 더군다나 이 시장은 이미 다른 메이커에서 선점을 하지 않았나? 쉐보레가 달리기 성능에 초점을 맞춘 트랙스도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고, 르노삼성이 귀여운 외모의 QM3로 선남선녀들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한 쪽에서는 단단한 내공으로 무장한 투싼과 스포티지가 버티고 있었다. 티볼리 디자인이 도드라진 것도 아니고, 엄청난 성능을 자랑하는 것도 아닌데, 쌍용차가 무리수를 둔 건 아닐까? 티볼리가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선입견이었다. 내 머릿속에는 예전의 쌍용차만 있었다. 오프로더로 튜닝한 구형 코란도, 예쁜 화장으로 얼굴을 다듬은 뉴 코란도, 10년은 앞선 디자인이라는 평을 받았던 무쏘, 국산차 역사상 최고급 SUV로 칭찬을 받았던 렉스턴만이 머릿속에 있었던 거다. 머릿속 이들과 티볼리는 한데 섞이지 못했다. 여기에 꽁무니를 늘린 티볼리 에어까지 등장한다.

그런데, 보고 생각하는 게 달랐다. 나는, 쌍용차는 이래야한다고 이미 그림을 그렸던 거다. 지금까지 내가 보고 생각했던 것들이, 미래에도 그대로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그림과 전혀 다르니, 이상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스스로 최면을 걸어버린 것이다. (나만의) 쌍용차답지 않기에 인기를 얻기는 힘들 거라는 확신은 그저 망상이었고 아전인수격 해석일 뿐이었다. 프레임 보디에, 단단해 보이는 큰 덩치를 소유한 SUV. 쌍용차가 꼭 이런 차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도 없는 데도 말이다.
나에게는 로보트태권브이의 어색한 조합으로 보였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위풍당당 로보트태권브로 들어왔을 수 있다. 쌍용차가 디자인 예쁜 차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박수를 보냈고, 적재공간을 키운 티볼리 에어의 실용성에 고개를 끄덕였을 수도 있다. 바탕에는 SUV 만들기 노하우가 뛰어난 쌍용차라는 메이커에 믿음을 보냈을 터이고.
소비자들은 선입견 없이 눈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 티볼리를 대했고, 선택했다. 티볼리는 국내 소형 SUV의 최강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여전히 도로를 달리고 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최윤섭 (<오토엔뉴스> 편집장)
최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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