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왜 연말에 신모델을? 제네시스 G90과 현대차 팰리세이드
[나윤석의 독차(讀車)법] 현대차그룹이 제네시스 G90과 팰리세이드를 잇달아 공개했습니다. 그런데 연말에 신모델을, 그것도 브랜드의 기함급 모델들을 공개하는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연말은 한 해의 판매 실적 달성을 위하여 다양한 판촉 프로모션이 넘쳐나는 험난한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새 모델 소식이라도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프로모션 뉴스에 떠내려가기 십상입니다. 새 모델이 주목을 받고 신차 효과를 노리기에는 결코 좋은 조건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현대차는 새 모델을 두 개나, 그것도 제네시스 브랜드의 기함과 현대차 SUV의 기함을 연말에 출시한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이 오늘의 질문입니다.

두 모델이 하루라도 서둘러 연말을 감수하고 출시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하루라도 빨리 내년 농사를 준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현대차그룹은 올해에 매우 힘들었습니다. 어려웠다는 지난해보다도 판매대수와 수익, 즉 양적 및 질적 측면에서 모두 성적이 떨어졌습니다. 제네시스 브랜드는 가장 중요한 시장인 미국에서 딜러 네트워크 문제로 G70의 출시가 늦춰지는 등 고생을 했고 현대차 브랜드는 SUV 라인업이 낡거나 허약하다는 점이 판매량 감소의 직접적 원인으로 지적을 받았습니다. 특히 제네시스 브랜드는 SUV 라인업이 없다는 것이 국내외에서 결정적 부진의 이유라는 평가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 브랜드는 내년에는 1월부터 바짝 고삐를 당기겠다는 의미로 해를 넘기기 전에 기함의 출시를 서두른 겁니다. 제네시스 G90은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어디에서나 이제는 G90입니다. 국내 시장에서도 어정쩡하게 에쿠스도 아니고 제네시스도 아닌 EQ900이라는 족보가 꼬인 이름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G90은 제네시스 브랜드의 기함에 걸맞은 이름과 함께 제네시스의 새로운 디자인 DNA를 처음으로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가죽 가공 브랜드 ‘파수비오(PASUBIO)’사나 스티치 공정에 ‘복스마크(BOXMARK)’사 등과 협업하는 등 명품 브랜드의 이름값에 기대는 전략을 버리고 자신만의 실력으로 훨씬 아늑한 인테리어를 완성하는 등 쌓여가는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G90이 이렇게 기함으로서 제네시스 브랜드의 아이덴티티와 디자인 DNA를 서둘러 선보이는 것은 내년부터 출시될 제네시스의 2기 모델들, 특히 GV80과 GV70 등 제네시스 최초의 SUV 라인업이 순항하도록 토대를 정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물론 현재의 핵심 모델인 G80 후속 모델, 그리고 국내에서는 아주 중요한 수익원이자 판매량도 높은 G90이 2019년 한 해 동안 온전히 판매될 수 있게 하려는 실질적 이유도 있습니다.

팰리세이드는 현대차의 기함입니다. 그랜저와 가격면에서는 거의 엇비슷하지만 거의 국내 전용 모델이 된 그랜저와는 달리 미주 등 해외 시장의 전략 모델이라는 점, 그리고 SUV가 브랜드의 기함이 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 있는 SUV 강세의 요즘 시장 트렌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대차는 지금까지 미국에서의 기함 역할을 싼타페가 하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경쟁 브랜드들에 비하여 라인업의 폭도, 그리고 기함의 격도 떨어졌다는 뜻이 됩니다. 이제는 코나부터 팰리세이드까지 촘촘한 SUV 라인업으로 2019년의 와신상담 회복을 노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국내 시장에서도 포드 익스플로러에게 내 주었던 대형 SUV 시장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이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왜냐 하면 G90이나 팰리세이드나 모두 지금 당장의 시장 공략을 위한 ‘오늘을 위한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GV70이나 GV80도 제네시스에게나 새 시장이지 이미 프리미엄 브랜드들로 바글바글한 시장입니다. 지난 칼럼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현대차에게 시급한 것은 미래차 시장에서 현대차가 어떤 모습과 역할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분명한 방향 제시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효율이 좋은 순수 전기차를 만들고 수소 연료 자동차에서도 가장 앞서는 등 기술적으로는 분명 강점이 있는 회사입니다. 그런데 ‘현대차가 생각하는 미래 사회와 자동차 시장은 이렇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쪽에 집중하겠다’라는 현대차의 독창적인 그림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G90과 팰리세이드 모두 잘 팔릴 겁니다. 시장 점유율도 올라가고 수익도 증가할 겁니다. 하지만 거기에서 만족하면 2012년에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는 지적을 받았던 경험을 다시 반복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 때보다 지금은 더 시간이 없습니다. 경쟁자들은 이미 2020년부터 미래를 시작하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나윤석
나윤석 칼럼니스트 : 수입차 브랜드에서 제품 기획과 트레이닝, 사업 기획 등 분야에 종사했으며 슈퍼카 브랜드 총괄 임원을 맡기도 했다. 소비자에게는 차를 보는 안목을, 자동차 업계에는 소비자와 소통하는 방법을 일깨우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