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의 독한(獨韓) 이야기] 소문만 무성했던 피아트크라이슬러(이하 FCA) 합병이 그 실체를 드러냈다. FCA는 프랑스 자동차 회사인 르노에게 지분을 50대 50으로 하는 합병을 제안했고 르노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할 것으로 전해졌다.
FCA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얘기는 있었지만 인수, 혹은 합병 카드가 맞지 않았는지 그간 구체적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특히 합병에 적극적이던 FCA 최고경영자 세르지오 마르치오네가 지난해 여름 사망하면서 일은 더욱 어려워지는 듯 보였다. 하지만 피아트크라이슬러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었고, 결국 르노 측의 긍정적 반응을 끌어내면서 업계에 큰 변화를 예고했다.
외신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실제 합병이 이뤄지기까지 길면 1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큰 돌발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두 회사가 하나로 합쳐질 가능성은 높다. 참고로 르노 지분 15%를 소유하고 있는 프랑스 정부도 이번 합병에 찬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FCA는 르노에게 합병을 제안했을까?

◆ 실적 부진
우선 장사가 안 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29%나 줄었다. 피아트의 본진인 유럽에서 판매량이 줄어든 것은 물론, FCA를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프(JEEP)도 미국에서 실적이 줄었다. FCA의 1분기 판매량은 1백만 대를 조금 넘겼는데 이는 1년 전 같은 기간에 비해 14% 줄어든 결과다.
거대한 아시아 시장에서도 별다른 실적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때 폭스바겐 등과 경쟁하던 FCA의 유럽 내 위상은 현재 많이 위축된 상태다. 그나마 지프와 램 등, SUV와 픽업이 북미 등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는 것이 위안거리였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문제는 이런 판매량 감소나 이익 감소가 조정기를 거치고 나면 다시 반등할 것이라는, 어떤 기대 요인이 없다는 점이다. FCA 혼자서는 자동차 시장에서 살아가기 힘들게 됐다는 말이다.

◆ 전기차 등 미래 시장 선점에 실패
요즘 배터리 전기차에 투자하고 신모델을 내놓는다는 소식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고, 전기차 생산을 언제까지 몇 대나 할 것이라는 계획안이 발표되는 것은 흔한 일이 됐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유독 조용한 자동차 회사가 있다. 바로 피아트크라이슬러다.
지난봄 제네바모터쇼를 통해 센토벤티라는 사용자 선택 모듈형 전기차를 선보였지만 이는 콘셉트카이며, 구체적인 전기차 양산 계획은 그룹 차원에서 공개하지 못한 상태다. 피아트 500이 전기차로 앞으로 출시될 것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이 역시 피아트가 공식 확인해준 것은 아니다.
전기차 시대를 맞을 준비가 늦은 탓에 미래 시장 선점에 실패한 것은 물론, 당장 이산화탄소 배출 문제까지 해결해야 하는 이중, 삼중고에 빠졌다. 결국 전기차 회사인 테슬라에 수억 달러를 주고 그들의 전기차 판매량을 FCA 자동차 판매량에 넣을 수 있는 권리를 사는 선택을 하게 됐다.
2021년부터 유럽에서는 제조사 평균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95g/km를 맞추지 못하면 엄청난 금액의 과징금이 부과된다. 벌금을 피하기 위해 제조사의 평균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낮춰야만 하는데 당장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자 돈으로 테슬라를 끌어들인 것이다. 이런 문제로 인해 FCA는 일찌감치 전기차 개발과 생산에 뛰어든 르노에 손을 내밀었다 볼 수 있다.

◆ 고정 지출 줄이기
일단 벌어들이는 돈이 적으니 나가는 돈을 줄여야 한다. 현재 상황만 놓고 보면 적자투성이인 자회사 마세라티와 알파 로메오를 처분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된다. 누차 이야기했지만 알파 로메오의 경우 당장 폭스바겐 그룹이 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기 때문에 해결이 가능하다.
하지만 FCA는 폭스바겐에게 자회사를 팔기보다는 르노와 함께 현재 브랜드를 일단 유지한 채 생산 라인을 통합하거나 공장을 줄여 인건비나 설비비에서 비용을 아끼는 길을 택할 가능성이 커졌다. 공장을 없애지 않겠다고는 했지만 이처럼 덩치가 크고 복잡한 자동차 회사들이 합병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인력 감축과 공장 폐쇄는 피하기 힘들어 보인다.
FCA는 합병이 된다면 매년 우리 돈으로 최대 7조 원의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이렇게 지출을 줄여 자율주행이나 전기차 생산, 그리고 미래 이동성에 걸맞은 다양한 첨단 기술 개발에 비용을 투자하고자 하는 게 이들의 생각으로 보인다.

◆ 서로의 약점 보완
피아트크라이슬러와 르노는 판매 시장 기준 약점이 있다. 르노는 유럽에서는 폭스바겐과 견줄 정도의 판매량과 탄탄한 기반을 마련했지만 아시아와 북미에서는 존재감이 없다. 반면 FCA는 쪼그라든 유럽 시장과 달리 크라이슬러와 지프, 램, 닷지 등, 북미 지역에서 선전하고 있고 기반이 확실한 브랜드들이 있다. 서로의 약한 곳을 메울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르노와 제휴관계인 닛산과 미쓰비시 등 일본 자동차 회사들이다. 현재 르노는 닛산의 지분 43.4%를 보유하고 있고 닛산은 반대로 르노의 지분을 15% 가지고 있다. 서로의 주식을 가지고 있지만 경영은 독립적인 상황으로, 르노는 닛산과 아예 회사를 합치는 것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닛산이 응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르노와 FCA가 합병하면 르노는 닛산과의 합병에 더 힘을 낼 수 있다. 아시아 시장이 필요하고, 규모의 경제를 이뤄내야 하는 르노와 FCA로써는 닛산과 미쓰비시까지 모아 폭스바겐 그룹, 그리고 토요타 등을 따돌리고 판매량 기준 글로벌 1위 자동차 기업으로 우뚝 서고 싶을 것이다. 이런 밑그림 실현을 위한 첫 발자국이 바로 르노와 FCA의 합병이다.

◆ 아녤리 가문의 현실주의
FCA의 대주주는 아녤리 가문의 지주회사 엑소르로 2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아녤리 집안의 외손자인 존 엘칸이 그룹 회장 자리에 있고, 분사해 별도로 증시에 상장했던 페라리 회장직도 맡고 있다. 그런데 이 젊은 회장은 과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회사가 현재 브랜드로 계속 생존할 것이란 기대는 크지 않다는 솔직한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브랜드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집안의 지분, 재산을 지키고, 재산을 늘리는 것에 힘을 쏟아야 한다. 따라서 FCA의 시장 가치가 더 떨어지기 전에 회사를 지켜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합병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실제로 합병이 성사되면 존 엘칸은 새로운 지주회사의 회장 자리에 앉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합병 논의에 긍정적이라는 르노의 반응이 나오자 주식 시장에서 FCA와 르노의 주식은 크게 뛰었다. 미래를 위해 벤츠와 BMW조차 손을 잡는 마당에,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포드와 폭스바겐이 제휴를 하는 상황에서, 피아트크라이슬러와 르노의 합병은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 보인다.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해 경쟁자들을 압박하는 게 소비자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다.
한 가지 문제라면 합병에 따른 실업에 대한 우려인데, 이 부분은 잘 협의해 최대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나길 바란다. 과연 르노와 FCA는 바라는 대로 하나의 회사로 합쳐질 수 있을까? 또 닛산과 미쓰비시까지 이 거대한 계획에 참여하게 될 것인가? 거대 자동차 공룡 기업의 탄생에 많은 관심이 쏠린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이완
이완 칼럼니스트 : <모터그래프> 등에 칼럼을 쓰고 있으며 ‘이완의 카폐인’이라는 자동차 동영상 콘텐츠 제작에도 참여하고 있다. 현재 독일에 살고 있으며, 독일의 자동차 문화와 산업계 소식을 공유하는 일을 즐기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