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스카 그대로의 슈퍼카, 슈판 962CR (1)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전설의 차, 포르쉐 956, 그리고 962. 슈판962CR의 희한한 탄생배경을 설명하려면 먼저 그 기반이 된 차, 1980년대의 포르쉐 내구 레이스카였던 차 두 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현재도 F1과 함께 서킷 레이스의 양대 산맥으로 추앙받는 세계내구챔피언십(WEC) 시리즈는, 과거에는 세계스포츠카챔피언십(WSC)라는 조금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지금보다 덜 빡빡한 규제 덕분에 별의별 괴물들이 넘쳐났던 시절, 그 중 가장 뛰어난 성능으로 레이스를 지배했던 브랜드는 역시 포르쉐였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오롯이 르망의 가장 앞줄에서 분투하며 보낸 회사에게, WSC는 자신의 존재를 입증할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1980년대가 되자, 포르쉐는 전선의 확대를 선언한다. 포르쉐의 신병기, 956은 WSC를 넘어 전세계의 내구 프로토타입 레이스를 평정하겠다는 원대한 목표 하에 만들어진 차였다.



그리고 956은 말 그대로 전세계의 내구 레이스를 ‘지배’했다. 포르쉐는 1980년대의 르망24시 경기 중 7번을 연속 우승하며 레이스를 독식했으며, 재규어와 벤츠, 푸조까지 가세한 난전의 와중에도 1990년대까지 승리를 이어간다.

956이 남긴 전후무후한 기록은 얼마 전까지도 유효했다. 전세계 스포츠카의 성지, 뉘르부르크링 북쪽코스를 6분11초13에 주파한 기록은 무려 35년 동안 유지되다가 2018년 6월에 깨졌다. 재미있게도, 그 기록을 깬 차는 르망을 2년 연속 우승한 956의 직계 혈통, 포르쉐 919 하이브리드 EVO였다.



네 번의 르망 우승을 포함한 수많은 승리를 거둔 956은 1984년, 최종 완성판인 962로 진화한다. 신형차가 서둘러 나온 이유는 956의 또 다른 무대, 미국 IMSA GTP의 새 규정 때문이었다. 운전자의 발이 앞바퀴의 중심선보다 앞으로 나왔다는 이유로 시리즈 참가를 거부당하자, 앞바퀴를 밀어내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덕분에 휠베이스가 길어지고, 956에서 지적된 구조적 문제까지 보완한 차는 956를 뛰어넘는 성능을 자랑했다. WSC의 최고봉, 그룹C의 규정(Homologation: 호몰로게이션)에 맞추어 개장된 차 ‘962C’로 포르쉐는 두 번의 르망 우승과 스물한 번의 레이스 우승을 거머쥔다. 그리고 근 삼십년 동안 이어지던 WSC의 역사에서 눈물을 머금고 퇴장한다. 아무리 레이스가 중요해도, 생존은 정체성보다 앞선 문제였다. 시판 모델의 연이은 실패로 인해, 포르쉐는 존립 자체를 위협받고 있었다.



◆ 그래도 962는 달린다

그러나 포르쉐의 철수 뒤에도 962는 여전히 전세계의 레이스에서 맹위를 떨친다. 개발과 운용이 전적으로 브랜드의 직속팀(works: 웍스)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차와 달리, 포르쉐는 962를 개인팀(Private team)에게도 팔았다. 포르쉐 레이싱의 저변을 넓히겠다는 호의라기보다는, 레이스 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지만, 전세계의 많은 레이스팀이 기꺼이 호응했다. 이미 성능과 내구성에서 정평이 난 포르쉐의 내구 레이스카를 산다는 것은, 웍스팀과 동일한 부품과 기술지원까지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크레머, 요스트, 다우어 같은 유명 레이스팀들이 962를 기반으로 레이스를 벌였으며, 그 중 일부는 962를 ‘개조’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아예 새로 창작하는 수준에까지 이른다.

지속적인 레이스 활동을 통해 962의 알루미늄 차대의 강성 부족을 느낀 팀들이 차체에 직접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이다. 알루미늄 허니컴 구조로 차대를 설계하거나 아예 카본 파이버 기반의 배스터브 구조물을 만든 뒤, 나머지 부품만 포르쉐에서 사서 차를 만들어 냈으며, 이것을 또 다른 팀에 팔기도 했다. 962에 대한 서드파티의 이해도가 본사를 넘어설 정도로 높아지게 되자, 엉뚱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962가 일반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 그냥 도로주행차로 만드는 건 어떨까?

레이스를 위해 만든 차가 도로를 달리는 일은 슈퍼카라는 장르의 시작이기도 했다. 시즌이 끝난 뒤 처치가 곤란해진 레이스카에 도로규정을 맞출 최소한의 개조를 한 뒤 부자들에게 팔아치운 것이 오늘날 페라리의 시작이었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정작 엔초 페라리는 이 고객들을 극도로 혐오했다). 시판 슈퍼카에 질린 부유한 마니아들에게, 전세계 내구레이스를 제패한 레이스카를 타고 일반도로를 달린다는 것은 엄청나게 매력적인 제안이었을 것이다. 독일의 현지법에 맞추어 지상고와 헤드라이트를 조절하고 방향지시등을 단 차가 시험적으로 번호판을 받게 되자, 이 차를 손에 넣고 싶다는 욕구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다.

시작은 독일의 튜너, 쾨니히 스페셜(Koenig Special)이였다. 과격한 페라리 튜닝으로 이름 높던 튜너가 선보인 차, C62는 합법적인 도로주행이 가능한 최초의 962로 유명세를 탄다. DP모터스포츠와 다우어도 도로주행용 962 만들기에 가세한다. 일반 도로를 달리는 962가 포인트였던 만큼, 이들의 생김새는 962의 형태를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 중 유독 판이한 모습의 차가 한 대 있었다. 1983년 르망 우승자였던 번 슈판(Vern Schuppan)이 만든 차, 슈판 962CR이였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변성용 칼럼니스트 : 자동차 전문지 <카비전>과 <자동차생활>에서 객원기자로 일했다. 파워트레인과 전장, 애프터마켓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업무를 수행하며 자동차를 보는 시각을 넓혔다. 현재 글로벌 자동차 전문지 의 객원기자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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